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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한 천재 화가라는 진부한 수식어는 그의 짧고 고통에 찬 인생을 놓고 보면 큰 의미가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에 미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 특히 흑인 화가로 산다는 것은 대중이 차별과 함께 색안경을 끼고 보게 만든 요소였다. 그가 미술관에 같이 간 여자친구 ‘수잔 멀록’에게 “이곳을 봐. 흑인이 하나도 없지?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흑인이 미술관을 들어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야.” 라고 얘기했다는 일화는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는지를 알려준다.

바스키아와 그의 연인 수잔 멀록, 이미지 출처 – 링크
‘Bird on money’(1981), 이미지 출처 – 링크

그는 감성이 풍부한 어머니 덕분에 어릴 때부터 많은 미술 전시를 다니면서 화가로서 자질을 쌓았으나, 7살 무렵에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힘든 유년 시절을 보낸다. 14살 즈음에 거리로 뛰쳐나오게 된 그는 거리 낙서인 그래피티를 접하면서 점차 그림의 세계로 빠져든다. 제대로 된 예술교육을 받지 않았으나 날 것 그대로이면서도 창의적인 그의 그림은 곧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이후 젊은 나이에 거머쥐게 된 부와 명예와 그로 인한 각종 미디어의 관심에 힘들어하면서 바스키아는 마약에 손을 댄다. 마약을 하면서도 작품활동을 열심히 하던 그는 앤디 워홀을 만나 그에게 의지하고 우정을 쌓으며 협업을 이어간다. 그러나 친구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앤디 워홀의 죽음으로 더는 버티지 못하고 워홀의 사후 1년 뒤에 약물 과용으로 사망하게 된다.

장 미셸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 이미지 출처 – 링크
한때 연인 사이였던 바스키아와 마돈나, 이미지 출처 – 링크

자신은 “흑인 예술가가 아니고 그냥 예술가다”라며 저항했지만 미국 예술계의 차별과 편견의 무게를 견디기에 연약했던 바스키아. 그는 사후 자신의 정신적 지주 앤디 워홀의 작품가를 경신하며 2017년 역대 미술품 경매사상 여섯 번째로 높은 가격에 일본 소장가에게 낙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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