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세상에 대한 예의입니다. 한 인터뷰에서 영화란 무엇인지 묻자 대만의 영화감독 허우 샤오시엔이 내놓은 대답이다. 이 말 안에는 영화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실제로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를 보면 세상에 대한 예의를 느낄 수 있다. 전 세계의 수많은 감독이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고 그의 신작을 기다리는 이유 또한 그의 태도 때문일 거다. 기술이 앞서는 시대에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여전히 영화의 태도에 대해 생각한다. 그의 영화가 삶과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보여주는, 세상에 대한 예의가 담긴 작품들을 살펴보자.

감독 허우 샤오시엔, 이미지 출처 – 링크

 

<비정성시>

1945년의 대만, 식당을 운영하는 ‘임아록’(이천록)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다. 첫째 ‘문웅’(진송용)은 장사를 하고, 둘째 ‘문상’은 일본에 징용이 된 후 소식이 없다. 셋째 ‘문량’(고첩)은 건달처럼 살고 있고, 막내 ‘문청’(양조위)은 8살 때부터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 채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다. 대만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뒤로 이들의 삶은 평탄할 것 같았지만, 이들은 시대의 혼란을 온몸으로 맞는다.

<비정성시>(1989)는 한 가족의 삶을 통해 대만의 역사를 보여주는 영화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대표작이다. 대만이 일본에 51년간 지배받다가 해방되는 1945년부터 대륙에서 밀려난 국민당 정부가 들어오는 1949년까지의 시기를 다루는 작품으로, 국민당 정부에 의해 수없이 많은 시민이 죽은 ‘2.28사건’을 포함하고 있다.

<비정성시> 트레일러

역사적 비극을 다루는 영화는 많고, 대부분은 최대한 극적인 구성을 택한다. 그러나 허우 샤오시엔은 조심스럽게 응시하는 것을 택한다. 롱테이크로 순간을 보여주고, 관객들은 그 순간을 조용히 응시하게 된다. 한 가족의 삶에서 역사를 보고, 상실을 느낀다. 허우 샤오시엔은 대만 역사가 겪은 상실감에 최대한의 예의를 지키며 순간순간을 조심스럽게 응시한다.

 

<남국재견>

‘가오’(고첩)는 마흔을 바라보는 깡패다. 그를 따르는 ‘아비’(임강), 아비의 애인까지 함께 돌아다니며 안정적인 미래를 꿈꿔보지만, 현실은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래도 그들은 희망이 있기를 바라며 남쪽을 바라본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남국재견>(1996)을 자신의 두 번째 데뷔작이라고 부를 만큼,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도 남다른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주연을 맡은 고첩과 임강, 두 사람 모두 허우 샤오시엔을 말할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이들이다. 고첩은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작품에 가장 많이 출연한 배우 중 한 명이고, 임강은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희몽인생>(1993), <호남호녀>(1995)에도 출연했고, 특히 <남국재견>에서는 배우이자 음악감독으로 참여했다. 뮤지션 출신인 그는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밀레니엄 맘보>(2001), <자객 섭은낭>(2015)에도 음악감독으로 참여했다.

<남국재견> 트레일러

<남국재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계속해서 좌절을 겪는다. 분명 저 멀리 희망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달려도 희망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희망이 있다고 믿었던 곳에 도달했는데, 막상 도달해보니 희망 대신 막막한 현실이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남국재견>이 품고 있는 고민은 대만을 넘어서 희망을 품었다가 좌절해본 모든 이들의 마음을 두드린다.

 

<해상화>

19세기 말 상해의 한 유곽, ‘왕’(양조위)은 ‘소홍’의 단골이다. 왕은 소홍의 빚을 갚아주고 결혼하기를 원하지만, 소홍은 그에 대해 확실하게 답하지 않는다. 왕과 소홍 이외에도 유곽을 오가는 이들 사이에서 크고 작은 갈등이 계속 일어난다.

<해상화>(1998)는 <비정성시>(1989) 이후 허우 샤오시엔 감독과 양조위가 오랜만에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130분의 러닝타임을 38개의 숏으로 채운 것으로 유명한 작품으로, 촬영을 맡은 마크 리 빙빙은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최근작 <자객 섭은낭>(2015)까지도 호흡을 맞추고 있는,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사유를 카메라로 가장 잘 풀어내는 촬영감독이다.

<해상화> 트레일러

<해상화>에 등장하는 관계들은 하나같이 아슬아슬하다. 유곽 안에 있는 이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해한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만나기도 하고, 서로를 오해해야만 유지되는 관계도 존재한다. 유곽 안에서 눈물을 흘리고 아편을 먹는 등 많은 사건이 일어나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영화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상해의 꽃으로 불리는 유곽이지만, 화려해 보이는 상해의 꽃이 시들지 않는 이유는 불행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자객 섭은낭>

‘섭은낭’(서기)은 최고의 실력을 갖춘 자객이다. 섭은낭은 스승으로부터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전계안’(장첸)을 암살하라는 명을 받는다. 자신의 과거 정혼자이며 현재는 위박 지역의 절도사인 전계안을 죽이라는 임무 앞에서 섭은낭은 고민한다.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자객 섭은낭>(2015)은 당나라 시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처음으로 찍은 무협 영화다. 서기가 주연을 맡은 작품으로, 서기는 <밀레니엄 맘보>(2001), <쓰리 타임즈>(2005)에 이어 <자객 섭은낭>까지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배우다.

<자객 섭은낭> 트레일러

<자객 섭은낭>은 무협 영화이지만 허우 샤오시엔은 액션보다 여백을 보여준다. 관객들이 목격하게 되는 건 섭은낭이 누군가를 쉽게 죽이는 장면이 아니라, 누군가를 쉽게 죽일 수 없어서 고민하는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 사람이 죽는 장면을 보는 일은 흔하지만, 허우 샤오시엔은 그 순간에 다시 한번 삶에 대한 예의를 갖춘다. 누군가를 죽여야만 하는 자객이 누군가를 죽일 수 없는 이야기를 통해, 세상이 반드시 지켜야 하지만 잊고 사는 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Writer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용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