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그린그래스의 필모그래피는 기묘하다. 경력 중 첫 10년을 TV 다큐멘터리 연출에 바친 후 뒤늦게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는데, 불과 세 번째 작품인 <블러디 선데이>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으면서 단숨에 스타가 되었다. 수상 이후의 바로 다음 행보는 놀랍게도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속편이었다. 이전에 액션 영화를 한 편도 찍어본 적 없는 그였지만 이 작품은 대성공을 이루게 되는데, 이 작품이 바로 본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본 슈프리머시>였다.

폴 그린그래스의 본 시리즈는 기존의 액션 영화 연출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놨다. 컷을 거의 매 초마다 나누고, 카메라는 세차게 흔들리며, 때로는 피사체를 화면 구석으로 몰아세우면서, 편집과 카메라가 액션의 주체가 되었다. 선명한 이미지를 제시하기보다는 스타일과 쾌감을 전달하는 데 집중한 본 시리즈의 연출 스타일은 새로운 정석이 되었다. 폴 그린그래스의 본 시리즈 이후 등장한 거의 모든 할리우드 액션 영화들이 그의 연출 스타일을 따를 만큼 혁신적인 변화였다.

그러나 오늘 소개하려는 것은 폴 그린그래스의 액션 영화들이 아니다. 지난 15년간 폴 그린그래스가 액션만큼이나 큰 관심을 두었던, 그러나 본 시리즈의 명성에 가려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세 편의 테러 소재 영화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영화들은 특유의 다큐멘터리적인 연출을 바탕으로 하며, 짧은 컷 분할과 현란한 핸드헬드(hand-held) 카메라를 활용하여 마치 그 순간 그 장소에서 직접 사건을 목격하는 듯한 생생함을 선사한다.

 

<플라이트 93>

2001년 9월 11일 뉴저지 공항, 민항기 한 대가 갑자기 항로를 이탈하고 관제센터가 교신을 시도하지만 어떤 응답도 들려오지 않는다. 연달아 여러 대의 민항기가 피랍된다. 피랍된 세 대의 비행기들은 하나씩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에 충돌하고, 네 번째로 유나이티드 93 편이 테러범들에게 장악당한다. 유나이티드 93 내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어쩔 수 없이 테러범들과 맞설 준비를 해야만 한다.

<플라이트 93>은 911테러가 발생한 지 불과 5년밖에 지나지 않은 해에 개봉했다. "왜 굳이 911테러를 소재로 하는 영화를 이렇게 빨리 만들어야 했는가?"라는 세상의 질문을 피해 갈 수 없었다. 폴 그린그래스는 합리적인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했고,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민감한 주제를 건드리기 위해서 그는 우선 그 어떤 등장인물에도 특별한 서사를 부여하지 않았다. 사건을 바탕으로 하여 또 다른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사건에 생동감을 부여해 충실히 재연하는 것만으로도 관객은 충분히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건을 충실히 재연하는 데에서 머문다는 점은 작품을 윤리적인 문제로부터 많은 부분 해방해주지만, 그저 재연이 목적이라면 이 작품이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극영화로 만들어졌어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극영화여야만 했다. 폴 그린그래스에게 어떻게 찍을 것인가 만큼 중요한 것은 무엇을 찍을 것인가였다. 본작에는 백악관이나 세계무역센터 혹은 사건 외부 어딘가의 시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가 택한 공간은 오직 공항 관제실과 군 사령부 그리고 유나이티드 93 비행기 내부였다.

<플라이트 93> 트레일러

공항 관제실과 군 사령부의 시점만으로 진행되는 전반부는 관객에게도 인물들이 알 수 있었던 만큼의 정보만을 제공하면서, 테러행위로부터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의 민낯을 그대로 전달한다. 흔들리는 카메라 속 급박하게 오가는 대화들은 우리가 마치 그 공간에 놓여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전반부의 무기력함 이후의 무대는 피랍되었던 네 번째 비행기, 유나이티드 93으로 옮겨간다. 그곳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이들은 국가를 위해 테러집단과 투쟁하는 영웅들이 아닌, 그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고자 어쩔 수 없이 테러집단과 싸워야만 하는 개인들이다. 관객들 모두는 이 영화의 과정과 결말을 낱낱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타까워하고 분노하게 된다. 이것이 재연만으로도 관객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는 섬세한 연출의 힘이다.

 

<캡틴 필립스>

화물선 앨라배마호의 선장 ‘리처드 필립스’(톰 행크스)는 19명의 선원과 함께 항해를 나선다. 소말리아 해상을 지나던 중 해적선이 뒤쫓아오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해적들은 이내 앨라배마호 위로 올라오는 데 성공하고, 선원들과 해적들은 치열한 대치를 벌이게 된다. 다행히 해적들을 배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지만, 그 조건으로 필립스 선장은 해적들과 함께 구명보트에 오르게 된다. 미 해군은 인질이 된 필립스 선장을 구해내야만 한다.

해상 테러 행위를 성공적으로 막아낸 필립스 선장과 미 해군의 실화는 테러 극복에 대한 가장 모범적이고 성공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이미 9.11 테러의 절망과 무기력함을 스크린에 옮겨낸 바 있는 폴 그린그래스는 이 해상테러 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4년 만에 영화로 재구성했다. <캡틴 필립스>는 <플라이트 93>에 대한 대답처럼 보인다. <플라이트 93>이 예상치 못한 위기가 찾아왔을 때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가 얼마나 무기력해질 수 있는가를 이야기한다면, <캡틴 필립스>는 그렇다면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에 관한 영화다.

<캡틴 필립스> 트레일러

<플라이트 93>에 비해 <캡틴 필립스>는 훨씬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다. 본작은 영웅적 서사를 띄고 있고, 이를 액션 스릴러 영화의 문법으로 풀어냈다. 러닝타임 전체를 테러 행위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시간으로 고스란히 옮겨 담았다. 본 시리즈에서 이미 선보인 바 있는 빠른 호흡의 카메라와 편집 기술들을 적극 활용했는데, 서스펜스를 직조하는 능력도, 그 긴장감을 두 시간 내내 이끌고 가는 완급조절 능력도 수준급이다.

 

<7월 22일>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 오슬로, 정부 청사 앞에 정차되어 있던 차량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 폭탄 테러의 범인 ‘브레이비크’는 경찰복을 입은 채 곧바로 노르웨이 노동당 청년 캠프가 열리고 있는 섬으로 향한다. 경찰 행세를 하며 배를 타고 섬에 도착한 브레이비크는 섬 안의 청소년들에게 총기를 난사한다. 브레이비크는 금방 체포되었지만, 살아남은 이들 모두는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사투를 벌여야 한다.

<플라이트 93>과 <캡틴 필립스>가 놓치고 있는 시간이 있다. 두 작품은 테러 행위 이후의 시간들, 혹은 테러 행위 주변의 시간과 장소들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플라이트 93>은 그 뒷이야기를 언급하지 않는 방법을 통해 희생자들을 애도했다. <캡틴 필립스>는 소말리아 청년들이 해적밖에는 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가볍게 언급 정도만 던질 뿐, 사건 이외의 시간과 장소들엔 관심이 없다. <7월 22일>은 두 작품이 다루지 않았던 테러 이전과 이후의 시간, 그리고 남겨진 자들과 그 가족들까지, 테러 사건 하나가 만들어내는 모든 고통과 싸움들에 집중한다.

<7월 22일> 트레일러

테러가 끝나고 남겨진 자들에게는 테러만큼이나 끔찍한 고난들이 남아있다. 누군가는 가족을 잃었고, 누군가는 친구를 잃었다. 또 누군가는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으며, 심지어는 걷는 법을 다시 배워야만 한다. 지금까지의 숨 가쁘게 돌아가며 긴장감으로 관객을 뒤흔들던 폴 그린그래스의 영화들과 달리, <7월 22일>은 담담하고 비교적 느리다.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싸움들은 그리 흥미롭지도, 긴박하지도 않다. 본작은 처절하고 괴로운 시간을 옆에서 지켜보듯 그려냈다. <7월 22일>은 다시 한번 <플라이트 93>과 <캡틴 필립스>에 대한 대답이다. 테러의 시간은 짧지만 그 뒤에는 수많은 고통의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고, 폴 그린그래스는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Writer

좋아하는 건 오직 영화 뿐이고 특히 68혁명 이전까지의 고다르 영화에 대한 광적인 팬이다. 스스로가 언젠가 대단한 일을 해낼 거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철이 없다.

강정화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