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35전을 치른 전직 권투선수라는 이색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19세였던 1942년, 당대 최고의 복서였던 슈가 레이 로빈슨(Sugar Ray Robinson)에게 8라운드 경기에서 무수히 펀치를 허용하고 웰터급 세계 챔피언이 되려는 꿈을 접었다. 어린 시절부터 배웠던 색소폰 대신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단 5년 만에 순회 연주에 나설 정도로 빠르게 연주법을 익혔다. 고향 텍사스 댈러스(Dallas)에서 직업적인 블루스 연주자로 처음 나섰고, 중도에 필라델피아를 거쳐 1946년 마침내 뉴욕에 입성하여 레드 갈란드(Red Galland)라는 이름으로 재즈계에 진출했다.

명반 <Groovy>(1957)에 수록한 ‘C-Jam Blues’ 악보. 왼손 복서였던 그는 왼손 화음(Block Chord) 연주를 특징으로 하여 블록코드 주법의 개척자로 불린다

그는 스윙 밴드에서는 레스터 영, 콜맨 호킨스와 함께 연주했고, 비밥의 전성기에는 찰리 파커의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며 최고의 색소폰 스타들과 함께했다. 그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기는,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의 창립 멤버로 들어가면서 찾아왔다. 소니 롤린스를 원하던 데이비스에게 신예 색소포니스트 존 콜트레인을 추천했고, 베이시스트 폴 챔버스(Paul Chambers)와 드러머 필리 조 존스(Philly Joe Jones)를 끌어들이며 소위 ‘First Great Quintet’을 구성했다. 이들 다섯 명은 1955년부터 1958년까지 최고의 인기 콤보로 수많은 명반을 남겼다.

레드 갈란드의 가장 유명한 오리지널 ‘Hey Now’(1957)는 요즘도 재즈 피아노 테스트 곡으로 자주 활용된다

하지만 이 콤보의 다섯 멤버 모두 마약 상용자로 바람 잘 날이 없었고, 사람들은 “Booze and Dope Band(술과 마약 밴드)”라 부르며 비난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레드 갈란드 역시 술과 마약에 빠져 밴드의 연주 일정에 늦거나 어떤 때에는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앨범 <Round About Midnight>(1957) 마지막 날 녹음에 나타나지 않아 마일스 데이비스가 그 대신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모든 일정이 끝나 멤버들이 해산한 후 뒤늦게 나타난 레드 갈란드는 “모두들 어디로 갔느냐?”며 엉뚱한 질문을 하여 데이비스를 분노하게 했다. 다음 날 그는 콤보에서 해고되었다.

음반 <John Coltrane with the Red Garland Trio>(1958)에 수록한 ‘Traneing In’. 후일 이 음반은 <Traneing In>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출반되었다

1950년대 후반 재즈 녹음이 왕성하던 시기에 그가 마일스 데이비스와 존 콜트레인과 함께 남긴 디스코그래피는 대단하다. 마일스 데이비스와는 마라톤 세션(Marathon Session) 음반 네 장을 시작으로 <’Round About Midnight>(1957), <Milestones>(1958)에 참여했고, 존 콜트레인과는 <Soultrane>(1958), <Traneing In>(1958), <High Pressure>(1962), <All Morning Long>(1958)을 함께 출반했다. 폴 챔버스, 아트 테일러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트리오를 조직하여 명반 <A Garland of Red>(1956), <Groovy>(1957)를 출반했으며, 그가 자신의 이름으로 남긴 음반은 그의 생애 50여 장에 이른다.

레드 갈란드 트리오의 <A Garland of Red>(1956)에 수록한 유명 발라드곡 ‘My Romance’

그는 45세가 되던 1968년 수년 동안 연주를 중단하고 한동안 사라졌고, 나이 많은 모친을 돌보아야 한다며 1970년대에는 고향 텍사스로 돌아갔다. 음반사들의 요청으로 계속 음반을 내기는 했으나 전정기 시절에 필적하는 명반은 나오지 않았고, 그의 이름은 재즈 팬들로부터 점점 잊혔다. 그의 전성기 시절 동료였던 마일스 데이비스와 존 콜트레인은 재즈 영웅이 되었고, 빌 에반스, 맥코이 타이너, 허비 행콕 같은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그의 자리를 대신하였다. 1984년 육십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가끔 그의 소식을 전하던 뉴욕 타임스조차 며칠 늦은 부고 기사를 낼 정도로 재즈 메인스트림에서 잊힌 스타였다.

레드 갈란드 트리오의 전성기 명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