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 하네케는 한국 나이로 48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영화감독으로 데뷔했지만, 세계의 관심을 끌어내고 정상의 자리에 오르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영화 평론가 출신 감독답게 그의 영화 세계는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 두드러진다. 영화 속에서 하네케의 위치는 영화 속 세계와 관객들 사이 어딘가에 자리한다. 그 사이에서 하네케는 둘 사이의 관계를 시험하고 관객을 향해 냉철한 질문을 건넨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는 냉소와 허무로 가득 차 있으며, 폭력의 현실적인 묘사를 통해 관객에게 충격을 안겨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많은 감정적 소모와 피로를 요구한다. 그 모든 감정의 소모와 충격, 피로가 제대로 기능하게끔 하기 위해 하네케는 영화 속 모든 장면과 대사 하나하나를 정교한 방식으로 엄격하게 통제한다. 그의 영화는 우리를 불편하게 히지만, 그의 완벽주의적 태도가 투영된 장면들은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고, 고민할 거리들을 제시한다. 여기, 폭력과 미디어에 관한 하네케의 대표작 네 편을 소개한다.

* 아래 본문은 영화 줄거리에 대한 스포일러가 조금 있습니다.

 

<퍼니 게임>

<퍼니 게임>은 영화 연출에 있어서 금기하는 표현을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관객들의 머릿속을 뒤흔들어 놓는다. 평화로운 마을의 한 가족에게 어딘지 모르게 불쾌한 손님 두 사람이 찾아온다. 이내 손님은 불한당으로 돌변해, 가족들을 괴롭히고 위협하기 시작한다. 본작은 기본적으로 스릴러 영화의 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폭력을 일삼던 화면 속의 악당들이 관객과 영화 사이 제4의 벽을 넘어, 카메라 너머의 관객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이 작품이 다른 스릴러 영화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갈 것을 깨닫는다. 폭력은 분명 원초적인 즐거움이다. 미디어라는 면죄부 뒤에서 몰래 폭력의 즐거움을 관음하던 우리에게 영화가 직접 우리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순간, 관객과 영화 사이 도덕이라는 팽팽한 장력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화면 속에는 계속해서 가족들에 대한 불한당들의 폭력이 이어지고, 이를 즐길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감독과 관객 사이의 게임은 영화가 두 번째 금기를 시행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스릴러 영화에서 일반적으로 아이와 동물을 죽이는 것은 금기시된다. 그러나 미카엘 하네케는 가족 중 첫 번째로 아이를 처참하게 살해한다. 영화가 윤리의 한계선을 한참 넘어서는 순간, 관객은 이 폭력을 더는 즐기지 않기로 확신했을 것이다. 관객의 승리로 넘어가는 듯한 이 순간, 하네케는 세 번째 금기를 시행하면서 다시 한번 상황을 반전시킨다. 아이를 살해한 살인마들이 떠나고 생존한 부모를 비추는 영화는 이때부터 스스로 지루해지기를 선택한다. 화면 너머 미디어 공간 속에 평화가 찾아왔다. 안전하지만 지루하고 정적인 평화다. 이 평화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혹은 내심 살인마들의 귀환을 기다리게 될 것인가, 이 게임의 남은 경험들은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퍼니 게임> 트레일러

<퍼니 게임>은 하네케가 그의 예술세계에서 가장 관심을 두는 주제 두 가지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하네케의 영화 세계를 관통하는 두 키워드는 '미디어'와 '폭력'이다. 미디어의 본질은 무엇인가? 인간은 폭력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일반적인 영화들을 관람하는 경험이 영화에 몰입한 관객과 영화 사이의 상호작용을 의미한다면, 본작이 제공하는 경험은 영화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을 관객과 영화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감독 사이의 독특한 긴장으로부터 비롯된다. 하네케는 특유의 허무와 냉소로 가득한 시선으로 영화와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 심연을 직접 관찰할 기회를 관객에게 제공한다.

 

<피아니스트>

음악학교의 피아노 교수 ‘에리카’(이자벨 위페르)는 어머니와 단둘이 생활하고 있다.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어머니의 옆에서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운다. 음악학교 교수로서의 교양 있는 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일탈에 대한 거대한 욕망을 간신히 숨기며 살아간다. 그러던 중 에리카는 음악적 재능을 가진 공대생 ‘월터’(브느와 마지멜)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서로를 욕망하기 시작한다.

자극적인 이미지가 가득 등장하는 영화들이 흔히 하는 실수 중 하나는 이미지가 감정보다 앞서서, 관객을 충분히 설득해내지 못하고 그저 충격들만 전시하는 영화가 된다는 점이다. 본작이 뛰어난 이유는 그 표현의 정도가 아주 과감한데도 느린 호흡과 엄격히 통제된 연출을 통해 모든 장면에 그 합리성을 충분히 부여하는 데 성공하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 트레일러

<퍼니 게임>이 미디어 속의 폭력에 대해 탐구하는 작품이라면, <파이니스트>는 보다 근본적인 폭력의 본성을 탐구한다. 하네케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중산층을 택하는데, 우아하고 기품 있어 보이는 중산층들의 삶이 처참히 파괴되어가는 모습들이 매번 등장한다. 자신 안에 내재한 도덕에 대한 추구와 자기 파괴에 대한 욕구 사이에서 헤매는 에리카의 모습은 곧, 이후 소개하게 될 하네케의 다른 작품들 속 주인공들로 치환될 수 있으며, 동시에 이들 모두는 하네케가 생각하는 현대 유럽의 여러 단면이다.

 

<히든>

TV 문학 토론 프로그램 진행자 ‘조르쥬’(다니엘 오뗴유)와 조르쥬의 아내 ‘안느’(줄리엣 비노쉬)의 집에 어느 날, 의문의 비디오테이프 하나가 배달된다. 비디오테이프는 두 사람의 집 맞은편 골목에서 촬영되었는데, 그 내용은 그저 몇 시간 동안 그들의 집 입구를 촬영한 것뿐이다. 자신들의 일상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 두 사람은 비디오테이프를 보냈을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추적하기 시작하는데, 그러던 중 조르쥬는 자신의 과거에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퍼니 게임>에 이어서 미디어를 영화 속에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또 다른 형식을 시도한 작품이다. 영화의 첫 장면이 독특한데, 조르쥬와 안느의 집을 비추는 카메라의 시점을 그대로 스크린에 투사했다. 관객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자신이 비디오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이러한 형식은 관객에게 전해질 긴장감을 증폭시킬 뿐만 아니라, 영화와 관객 사이에 비디오라는 새로운 매개체를 등장시킴으로써, <퍼니 게임>보다 객관적인 시선에서 미디어의 속성을 관찰할 기회를 관객에게 제공한다.

<히든> 트레일러

<퍼니 게임>과 마찬가지로, <히든>의 줄거리 역시 스릴러 영화의 작법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본작 역시 스릴러 영화들의 특징들과는 점차 거리를 벌여나가면서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조르쥬가 자신의 과거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안정된 삶을 위협해오는 누군가에 대한 불안'과 '어린 시절의 자신이 누군가에게 가했던 위협에 대한 죄책감'의 두 감정은 동일선상에 놓이게 된다. 자신이 마땅히 느껴야 할 죄책감은 지워내고, 눈앞에 놓인 불안에 더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조르쥬의 모습은 개인사의 측면에서도 흥미로울 뿐 아니라 현대 유럽의 또 다른 모습 중 하나로서도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하얀 리본>

1913년 독일의 한 작은 마을, 말을 타고 가던 동네 의사가 누군가 마당에 몰래 설치해놓은 줄에 걸려 넘어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의사의 사고를 시작으로 마을에서는 연달아 실족사, 실종, 유괴 등의 사고뿐 아니라 남작의 헛간에 누군가 불을 지르고, 장애가 있는 아이의 눈이 도려내지는 등 끊임없이 잔혹한 일들이 반복된다. 한편, 목사의 자녀 '마르틴'(레너드 프로소프)과 '클라라'(마리아-빅토리아 드래거스)는 집에 늦게 돌아왔다는 이유로 그들의 팔과 머리에 순수의 상징인 하얀 리본을 묶고 다닐 것을 강요받는다.

누가 주인공인지 명확히 말할 수 없을 만큼 본작에는 많은 인물과 사건들이 늘어져 있다. 이어지는 많은 사건 속에서 어른들은 은연중에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하고, 아이들은 점차 자신들끼리의 유대감을 강하게 드러낸다. 각 사건들의 범인이 누구인지에 집중하며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 작은 마을의 모습이 마치 인간의 역사와 꼭 닮아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빛과 어둠이 선명하게 대비되는 흑백의 화면 속에서 어른과 아이, 폭력과 순수, 이성과 본능의 대립쌍들은 점차 하나로 융화되어 간다. 인간과 폭력에 대한 하네케의 탐구의 대단원에 해당하는 이 작품은 2009년 제62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Writer

좋아하는 건 오직 영화 뿐이고 특히 68혁명 이전까지의 고다르 영화에 대한 광적인 팬이다. 스스로가 언젠가 대단한 일을 해낼 거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철이 없다.

강정화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