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에 가까운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 유럽 전역이 피로 물든 20세기의 잔혹사는 문학이 지속해서 다뤄온 주제다. 이 시기를 다룬 문학은 개인성이 파괴되는 광경을 따라가면서 나치 치하의 참상을 드러내고, 총구 너머 남겨진 자의 삶을 주목한다. 무엇보다 그간 주목하지 않았던 전쟁의 이면을 들춘다는 점에서 픽션의 틀을 넘고 문학의 경계를 허문다. 오늘은 2차 대전의 참상을 다룬 작품 중에 여성의 얼굴을 바라보는 두 편의 소설을 소개한다.

 

<책 읽어주는 남자>(1995)

이제 막 열다섯이나 됐을까? 열병에 걸린 한 소년이 거리에서 토악질한다. 지켜보기 힘들 정도로 고역스러운 표정이다. 벽을 짚는 선 모습이 꼭 병든 강아지 같다. 키는 멀대처럼 큰데 구부정한 몸과 앳된 얼굴을 보니 여태 어린 티를 벗지 못했다. 소년은 채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이 배수로를 통해 흘러가는 걸 빤히 지켜본다. 그 와중에도 손에 꼭 쥔 책은 비에 다 젖어버렸다. 소년은 겨우 고개를 들고 이리저리 둘러본다. 무관심을 미덕으로 여기는 도시답게 누구 하나 소년을 돌보지 않는다. 머쓱해진 소년이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마침 검은 코트를 입은 나이 든 여인이 다가온다.

그의 집에서 잠시 몸을 뉜 소년은 눈을 뜨자마자 부끄러움에 급히 달아난다. 며칠간 집에서 병마와 싸우다 겨우 정신을 차린 소년은 다시 나이 든 여인을 찾는다. 제 무례함을 깨달았는지 꽃을 사 들고 그의 집 앞을 서성인다. 늦은 저녁에야 퇴근한 그는 소년을 다시 집으로 들인다. 허름한 집에 들어서니 단출한 세간에 낡은 책상이 눈에 들어온다. 욕실과 주방이 한 공간에 담겨있다. 소년은 잠시 머뭇거리다 수줍게 자신을 소개한다. ‘미하엘’, 근처 중학교에 다니고 있다.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고 민망한 인사치레를 한다. 나이 든 여인의 이름은 ‘한나’.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는 그는 별 대화도 없이 미하엘을 침대로 이끈다. 서로를 살피던 두 사람은 마치 당연한 수순처럼 섹스한다. 이후 매일같이 밀회를 하게 된다. 독특하게도 한나는 늘 관계 전에 미하엘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요구한다. 가방에 늘 책을 지나고 다니는 미하엘은 저녁만 되면 그를 위해 소설을 낭독한다. 마치 의식처럼 낭독과 섹스에 탐닉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아무런 말도 없이 미하엘을 떠난다. 이후 몇 년의 시간이 흘러 법대생이 된 미하엘은 우연히 참관하게 된 재판정에서 피고인 신분으로 전락한 한나를 마주한다. 열병과 같은 첫사랑과 무책임한 이별의 아픔을 안긴 한나의 몰락을 마주한다.

“그러니까 저는, 제 말은 재판장님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법정에서 나치의 조력자라는 죄목으로 추궁을 받던 한나는 모두에게 묻는다. 당신은 그때 그의 처지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독일이 벌인 전쟁, 혹독한 생활고, 유럽 전역에 퍼진 전염병. 생존이 모든 이념과 가치를 전복한 유럽 대륙에서 그는 나치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 맹목의 사회는 그를 생계의 절벽으로 내몰았고, 정부는 전쟁물자 확보가 날로 어려워졌다. 보살펴 줄 가족도 없고, 문맹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 한나는 살아남기 위해 어디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권력이라도 맛봤지, 뭘 몰랐던 그는 오직 무지한 죄로 역사의 심판대에 올라선다. 한나의 눈빛은 거만하고 상처받은, 길 잃은 고양이처럼 한없이 피곤해 보인다. 그것은 아무도 그리고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는 시선이었다. 그는 이제 전후 세대의 숙제로, 죄의식의 재물로 법정에 섰다. 당신이라면 그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 한나가 묻지만, 그의 눈엔 독일인의 복잡한 심경이 겹쳐진다. 오늘도 사무실에서 상사의 지시를 따른다. 일상이 반복되면 어느새 관성처럼 일하는 나를 발견한다. 묻고 따지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평온하다. 시대적 사명에 거리로 뛰쳐나와 돌이라도 던지며 저항했던 지난날은 서정시와 함께 사라졌다. 오로지 편안한 노후를 위해 오늘 하루를 대충 수습한다. 잠시 호흡을 고르던 한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내게 묻는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머리는 그렇지 못하다.

이 작품은 무지하다는 것에 관해 말해야 마땅하다. 두 사람의 충동적인 동침은 한나의 도피로 종지부를 찍는다. 가냘팠던 소년은 상실감과 폐허 같은 마음으로 청년기를 통과한다. 그리고 한나가 법정에 나타났을 때 그는 한나가 읽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두 사람은 노골적으로 전범 세대와 전후 세대를 은유한다. 늘 서로를 마주하지만, 반대편에 서서 묘한 긴장감을 이루는 그들 관계는 독일이 가진 딜레마와 다르지 않다. 봉합할 수 없는 갈등을 지닌 두 두 세대는 끝내 파열한다. 한나는 뭘 몰라서 비극에 휘말렸고 미하엘은 한나 세대의 무지함을 심판하고 죄책감을 털어내기 위한 자리에 섰다. 두 사람은 나이를 뛰어넘는 은밀한 사랑을 나눴지만, 섹스 외에 모든 소통은 미하엘이 한나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데 그쳤다. 한나는 지속해서 미하엘이 읊는 지성의 산물을 접하며 매료됐다. 한나는 그저 듣는 게 가장 속 편한 사람이다. 한나는 미하엘이 책을 다 읽어주고 나서야 섹스를 허락한다. 한나는 관계에서마저 수동적이고 의존적이다. 그가 미하엘에게 글을 배웠다면 어땠을까? 자존심을 접고 자신도 뭔가를 읽고 생각하는 데까지 나아갔다면 상황이 지금과 달랐을까?

한나는 성실한 근무태도로 직장에서 사무직으로 승진하지만, 글을 읽어야 하는 자리에 오르자 급히 회사를 떠난다. 자신이 문맹이 밝혀질까 두려워 아무런 말도 없이 미하엘을 버린다. 한나의 무지하고 무책임한 태도는 제 이야기를 하길 겁내는 독일인이 가진 죄의식과 비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이 명백하게 전범 세대에 날을 세우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류의 인격을 가진, 비상식적인 학살을 저지른 그들의 몽매함에 비수를 꽂는다.

미하엘은 한나가 떠난 이후 평생에 걸친 후유증에 시달렸다. 자신이 그를 떠나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으며, 그는 감정에 무딘 남자가 되어 청년 시절 활기를 잃었다. 전범 세대의 무지함이 전후 세대를 평생 죄의식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꼴이다.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두 남녀의 비극을 통해 인간적으로 한나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죄를 용서할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죄의식은 세대를 타고 전이되고, 미하엘은 평생 감옥에 갇혀 사게 될 그를 위해 다시 책을 읽어준다. 슬픔 외에도 타고 흐르는 증오와 원망, 연민을 곁들여서, 설명해내기 어려운 복잡한 심경으로 다시 무거운 책을 펴든다. 결국 고쳐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우리 모두 그들의 과오를 알고 있다. 속죄는 그렇게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출소를 앞둔 한나는 미하엘에게 묻는다. “왜 나에게 답장을 쓰지 않았어.” 미하엘은 답하지 않고 되묻는다. “죽은 자들에게 죄책감을 느끼느냐.” 미하엘이 가장 묻고 싶었던 건 죄의식의 잔존이다. 미하엘은 궁금했다. 결국 문맹을 벗어난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 걸까. 그때 한나의 표정은 미묘하게 실망하는 것처럼 바뀐다. “내가 뭘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뭘 느끼는지도 중요하지 않지. 죽은 자들은 여전히 죽어 있을 뿐이야.” 작가는 굳이 이 장면을 넣어서 전후 세대와 전범 세대의 화해를 유예시킨다.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를 스스로 묻고는 변한 건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한나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끝에 이르러 난 다시 이 문장을 손에 쥔다. “내가 책을 읽어주는 것은 한나에게 이야기하는 그리고 그와 내가 이야기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수 있겠냐고 항변하던 영화는 결국 출구 없이 끝을 맺는다. 어쩌면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이 작품을 쓰며 용서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해받고 싶었을까?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2018)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95세 할머니 마고 뵐크가 자신이 젊은 시절에 히틀러의 독일판 기미 상궁이었음을 고백했다. 처음엔 나치 부역자로 몰릴까 봐 두려워 평생 속으로만 앓았다. 그에겐 악몽과도 같았던 기억이 되살아날까 노심초사하며 살았다. 그는 느지막이 언론을 통해 제 사연을 털어놓았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고 대나무 숲에서 외쳤던 신라의 어느 북두장처럼 개운한 마음이었을까? 그의 사연을 신문에서 본 이탈리아 남부 출신의 78년생 작가 로셀라 포스토리노는 이 일을 소설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로 집필했다. 이야기는 1943년에 시작된다. 스물여섯 ‘로자’는 베를린에서 폭격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남편 고향 마을에 정착한다. 하지만 남편마저 전장으로 훌쩍 떠나고, 시부모님과 오매불망 남편만 기다리며 조용히 살아간다. 하지만 가만한 나날도 잠시, 적에게 독살당할 것을 우려했던 히틀러는 로자를 비롯한 아리아족 계열의 독일 여성 열다섯 명을 기미 상궁으로 고용한다.

젊은 여성들이 겁에 질린 채 히틀러의 음식을 시식한다. 온갖 산해진미가 나와도 심각한 표정으로 죽음을 염두에 둔다. 작가는 음식에 관한 묘사를 최대한 자제하고, 심리적인 허기에 집중한다. 식도를 따라 흐르는 수프와 빵조각은 주책맞게 달콤하지만, 짐짓 모욕을 느낀 로자는 온갖 고민에 휩싸여 속이 시끄럽다. 하루아침에 나치 정권의 부역자로 살아가게 된 자신의 처지를 자괴한다. 남편의 생사는 여전히 불명한데 어느새 포만감에 휩싸여선 남은 음식을 재빠르게 입에 넣기 바쁘다.

기억은 편향적이라 엄연한 사실마저 제멋대로 뒤튼다. 우리가 아는 제 삶은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이제까지 우리 자신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재생할 때마다 변형되는 카세트테이프처럼 훼손을 감수해야 한다. 작가 '줄리언 반스'의 말처럼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에 불과하다. 기록만이 편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은 95세 할머니의 비극적인 생애에 발언권을 주었다. 마치 일급 변호사를 붙여준 것처럼 당위와 애정을 선사했다. 난 그의 기억이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는지엔 관심이 없다.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는 인생에서 중요한 일은 오로지 기억나는 일뿐이라고 했다. 내게 중요한 건 잊힐 게 자명했던 삶을 들여다보고, 지워질 만한 기억을 되새기는 과정이다. 역사의 복판에서 애처롭게 떨고 있는 노인의 삶에 서사를 안긴다는 점에 착안한다.

작가 이언 매큐언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 중에 창작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를 들려준 바 있다. 그는 작품에 흉부외과 수술 과정을 넣기 위해 저명한 의사에 협조를 구했다. 수술 과정을 직접 목도하고 현실에 가깝게 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수술 당일 일방적으로 일정을 취소해버린다. 그는 굳이 수술 과정을 목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늘 가던 작업실에 틀어박혀 소설에 중요한 대목이 될 수술 집도 과정을 자기 식대로써 내려갔다. 연필로 심장 가슴을 가르고 타자기로 심장 판막을 도려낸다. 그의 말대로라면 소설의 리얼리즘이란 현실을 모사하는 게 아니다. 작품 내에서 내적 필연성에 얻어내는 문예사조로 이해해야 한다. 소설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에는 부러 서술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마고 뵐크의 인터뷰엔 남아 있지만, 작가는 굳이 취하지 않고 버린 게 더 많다. 대신 작가는 농담과 낭만을 소설에 첨가했다. 부러 애틋한 로맨스를 끄집어내고, 친구끼리 찧고 까부는 기억을 그러모아 시간의 틈을 찾아냈다. 난 그게 소설이 택할 수 있는 내적 필연성의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한다. 좀 더 나아가서 문학이 역사에 속죄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은 비극을 온몸에 두른 여인에게 손을 내민다. 세계의 영원불멸한 고전이 그랬던 것처럼. 난 몸을 굽신거리며 서가를 맴돌다 빠져나왔다.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