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페퍼(좌)와 프랭크 모건(우)의 머그샷(숏)(경찰 기록용 사진). 두 사람(은) 인생 후반에 재기한 재즈 색소포니스트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1950년대는 재즈가 미국의 대중음악을 대표하던 시기였다. 대도시에는 다운타운마다 재즈 클럽들이 성황을 이루었고 많은 재즈 스타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마약과 범죄라는 아픈 흑역사가 있었다. 많은 재즈 아티스트들이 그들의 우상 찰리 파커(Charlie Parker)를 따라 마약에 빠져들었고, 약값을 벌기 위해 무리하게 연주를 하거나 심할 경우 범죄에 연루되기도 했다. 아트 페퍼(Art Pepper, 1925~1982)와 프랭크 모건(Frank Morgan, 1933~2007)은 ‘재즈와 마약’이라는 재즈 흑역사의 상징적인 인물들이다. 둘 다 젊은 시절 최고의 색소폰 연주로 일찍 스타덤에 올랐으나, 마약과 범죄에 연루되면서 전성기의 대부분을 교도소와 재활 시설에서 보내야 했다. 두 사람은 1962년 캘리포니아의 산 쿠엔틴(San Quentin) 교도소에서 수감자로 만나 친분을 쌓았고, 토요일마다 ‘Warden’s Tour(교도소장의 투어)’라는 재즈 연주회를 열었다. 그들은 교도소의 스타였고, 연주를 보러 온 방문객에게는 입장료를 받았다고 한다.

 

서부 지역 최고의 알토 색소폰 연주자, 아트 페퍼

1968년 재활원에서 만나 결혼한 아트 페퍼 부부. 부인 로리 페퍼는 결혼 후 아트 페퍼의 재활에 온 힘을 쏟았다

아트 페퍼는 젊은 시절 잘생긴 외모와 빠른 속주로 서부 지역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알토 색소폰 연주자였다. 그의 연주 실력은 동부 지역을 대표하던 찰리 파커와 함께 양대 축을 이룰 정도로 뛰어났으나, 마약 소지 및 관련 범죄에 깊이 빠지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다. 그를 대표하는 앨범인 1957년 작 <Art Pepper Meets the Rhythm Section>은 앨범 타이틀이 의미하듯 당대 최고로 평가받던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 밴드의 리듬 섹션(rhythm section) 3명을 초빙해 협연한 앨범이다. 당시 그는 이미 마약으로 한차례 수감된 후였으며, 녹음 당일에도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간신히 녹음을 마쳤음에도 이를 명반의 반열에 올렸다.

<Art Pepper Meets the Rhythm Section>은 마일즈 데이비스 퀸텟의 레드 갈란드(피아노), 폴 챔버스(베이스), 필리 조 존스(드럼) 3명과 함께 연주한 명반이다

그는 1954년부터 교도소를 들락날락하기 시작해 1965년까지 무려 네 번의 형기를 마쳤고, 재활원 치료까지 하면서 20여 년간 재즈 신에서 잊혔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마약을 완전히 떨쳐냈고, 이후 1982년 뇌출혈로 56년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남은 인생을 음악과 가족에 전념한다. 그는 자신의 다사다난했던 인생사를 구술로 녹음해 1979년 부인 로리 페퍼(Laurie Pepper)와 함께 <Straight Life>라는 책을 출간한다. 이 책은 문단의 호평을 받았고, 재즈계의 대표적인 자서전이 되었다. “자서전이 유명해져 나의 음악을 모르는 관객들도 많이 음악을 들으러 온다” 라는 자조섞인 말을 하기도 했다.

Art Pepper 'Caravan'. 허리를 굽히면서 연주하는 특유의 스타일을 볼 수 있다.

 그는 성공적으로 재기한 1975년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7년간 무려 35장의 앨범을 발표했을 정도로 음악에 매진했다. 여기에는 그의 부인 로리의 역할이 컸다. 같은 음악도 출신인 로리 또한 마약 상용과 자살 시도 끝에 시나논(Synanon)이란 마약 재활병원에 입원했고, 거기서 아트 페퍼를 만나 평생의 동지가 된다. 지금도 L.A. 지역에서 사는 로리는 3년 전 <ART: Why I Stuck with a Junkie Jazzman(나는 왜 마약쟁이 재즈맨에 빠지게 되었나)>라는 자서전을 출판한 바 있다.

Art pepper ‘Nature Boy’. 아트 페퍼는 재기 후 소울이 넘치는 감성 발라드를 자주 연주했다

 

찰리 파커의 후계자로 주목받았던 프랭크 모건

프랭크 모건은 한국계 색소포니스트 그레이스 켈리와도 멘토와 멘티로 인연을 맺었다

프랭크 모건은 마약과 범죄로 떠나 있던 재즈계에 30여 년 만에 복귀하여 재기한, 재즈 흑역사의 대표적 인물이다. 재즈 기타리스트였던 아버지의 소개로 7세 때 찰리 파커를  만나 멘토로 삼았으며, 10대 시절에 이미 덱스터 고든(Dexter Gordon),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같은 거장과 연주를 할 정도로 스타의 길을 착실하게 밟아 나갔다. 찰리 파커가 사망한 후에는 ‘버드(Bird, 찰리 파커의 별명)의 후계자’로 각광받았으나, 그가 동경하던 파커처럼 일찍이 마약에 깊이 빠져든다. 그는 20세 되던 1953년 처음으로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첫 앨범을 출반한 해인 1955년부터 약 30여 년간 교도소와 자립원을 들락날락하게 되면서 재즈 신에서 사라졌다. 52세가 되던 1985년에야 재즈 신에 복귀하여, 2007년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20여 장의 음반을 내면서 남은 인생을 소중하게 살았다.

1989년 발표한 앨범 <Mood Indigo>는 차트 4위까지 오르며 재기의 신호탄이 되었다

모건의 굴곡진 인생사는 매체에서 자주 다루는 소재가 되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왜 마약에 빠지게 되었냐는 질문을 받고, “나는 성공이 두려웠고 실패가 두려웠어요. 남들이 나에 대해 평하는 만큼 잘 되지 않을까 봐 두려웠어요. 나 자신이 되기보다는 ‘버드(찰리 파커)’가 되려고 했던 게 내 인생을 말아 먹었어요”라고 말한 바 있다. 너무 일찍 성공 가도를 달린 데서 오는 중압감이 컸다는 얘기다. 모건이 마약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버드’는 “너의 상식으로도 마약이 나를 어떻게 타락시켰는지 알 것이다”라며 격노했지만, 이내 버드와 함께 마약을 한 적도 있었다고 회고한다.

추리소설 <Bosch>의 오디오북에 수록된 ‘Lullaby’. 저자 마이클 코넬리는 이 곡을 받자마자 20번 이상 들으면서 감탄했다고 한다

미드로도 제작된 소설 <Bosch>로 유명한 추리소설가 마이클 코넬리(Michael Connelly)와의 인연은 유명하다. 재즈 팬인 코넬리는 2007년 버클리 음대의 교육 프로그램에서 젊은 음악학도들을 위한 모건의 강연과 연주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해 모건이 사망한 뒤, 코넬리는 다큐멘터리 <Sound of Redemption: The Story of Frank Morgan(속죄의 사운드: 프랭크 모건 이야기)>의 제작에 나섰고, 2014년 L.A. 영화제에서 상연하였다. 코넬리는 “내가 이 영화의 제작에 나선 이유는, 전적으로 나에게 감동과 세상과 공유할 가치가 있는 인생의 메시지를 준 한 아티스트에게 감사하기 위해서다”라고 밝힌 바 있다.

프랭크 모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Sound of Redemption> 예고편

아트 페퍼와 프랭크 모건. 두 사람의 젊은 시절 음악의 뿌리는 웨스트 코스트 재즈와 비밥으로 서로 다르지만, 마약에서 벗어나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한 인생 후반의 음악적 요소는 상당히 비슷하다. 가슴 속 깊은 소울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운 멜로디로 가득했고, 특히 모건은 그의 멘토인 찰리 파커의 비밥 스타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평론가 마이클 베일리(Michael Bailey)는 두 사람의 음악을 비교하면서, “두 사람 모두 초창기에는 박하향 같은 차가운 소리를 지녔지만, 재기 후에는 발라드 해석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되었다”라고 평가하였다. 두 사람의 음악은 미국 드라마 <Bosch>에서 배경음악으로 자주 들을 수 있다. 의롭지만 외로운 형사 보쉬가 L.A. 야경을 뒤로 한 채 홀로 집에 돌아왔을 때 턴테이블에 올리는, 그런 스타일의 음악이다.

프랭크 모건의 1993년 작 ‘Listen to the Dawn’. 기타리스트 케니 버렐과의 듀오 연주. 비밥 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신의 스타일을 찾았다는 평이다

 

(메인이미지 출처- <Sound of Redemption> 50초 영상 커버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