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면 서점에 가 문학도라면 능히 읽을만한 책을 고른다. 드높은 명성과 그만큼 난해하다는 악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딱딱한 표지를 만지며 감격한다. ‘너를 매일 밤 침으로 흠뻑 적시더라도 우리 끝장을 보자.’ 하는 마음으로 책을 계산한다. 책을 고를 때 이름값을 따지다 보니 늘 명사의 추천에 귀가 펄럭인다. <지식인의 서재>에 나온 필독서를 기웃거리고, 노벨문학상 부커상 퓰리처상 공쿠르상 같은 이력으로 책의 우열을 가린다. 알려지지 않은 책은 등한시하고, 대문호의 품에서 아양을 떤다. 그렇게 책장에 꽂아두고 방치한 책이 한 트럭이다. 엄마는 내가 그 책을 다 읽은 줄 알고 의아해하신다. 책을 많이 읽으면 분명 지혜롭고 현명한 어른이 된다고 믿으시는데, 난 여전히 소파에 누워 발가락을 후비는 어리석은 아들일 뿐이다. 나처럼 허영심으로 책을 접하게 되면 시대의 화두를 다룬 책에 무감해진다. 현실이 가리키는 바를 성실히 기술하는 요즘 작가와 멀어진다. 이왕이면 어디 가서 뽐내기 좋은 책만 고르니, 막상 주위 사람들이 가진 문제의식을 둘러보지 못한다. 고매한 지성의 가르침에 정신이 벙벙해서 시대의 고통을 살피는데 게을러진달까? 요즘 감수성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감수성은 타인에 대한 반응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능력으로, 예민하게 타인이 어떻게 느낄지 상상할 수 있는 태도다. 불편하고 귀찮다고 지끈거리는 통증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지각변동을 외면한다면 감수성 부족에 따른, 차별과 혐오에 무뎌질 것이다. 여기 기존 질서를 찢고 나오는 새로운 빙산의 등장과 암암리에 상처를 받은 이들에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대의 감수성을 말하는 책 두 권을 소개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2019)

김지혜 작가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책이다. '누가 차별하지 말고 살아야 하는 걸 모르나.'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뻔한 말을 책으로 읽긴 싫었다. '이건 어디 가서 떠들지도 못할 얘기잖아. 괜히 한마디 보탰다가 욕먹기에 십상이지.' 이런 생각으로 책을 폈고, 책장을 다 덮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며칠 전 한 모임에서 만난 친구에게 “너는 시어머니들이 선호하는 며느리 직업을 가졌다”고 칭찬했다. 오는 길에 본 뉴스 기사를 떠올리며 뱉은 말이었다. 네가 최고라니까 얼마나 좋을까? 나였어도 좋을 것 같아서 스스럼없이 추켜세웠다. 내 딴엔 듣기 좋은 농담이라고 실실 웃으면서 과장했다. 그의 입장을 상상하지 못했다. 결혼 생각이 있는지도 모르는 친구를 결혼을 원하는 30대 여성이라는 범주로 구분했고, 더욱이 시어머니들의 평가 대상이자 누군가의 신붓감으로 대상화했다. 그가 어떤 삶을 바라며 사는지도 모르면서 스테레오타입으로 그를 치부했다. '이런 말을 지겹게 들었을 텐데, 나도 그 지겨운 놈 중 하나가 됐구나.' 아무리 문학을 읽고 뭘 좀 안다고 써대도 이 모양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기분이 나쁜 내색을 했음에도 '뭘 그리 발끈해'라는 표정으로 무안을 줬다는 점이다. 사과는커녕 내 말이 별거 아니었다는 식으로 눙쳤다. 난 훌륭한 방어기제를 갖추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음 날 쓴 커피를 마시면서 기억을 곱씹을 때 뭔가가 버석거린다고 느꼈다. 이후 며칠 동안 불편한 마음이 날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고순’(고현정)은 제 인생과 배우자에 대해 섣불리 넘겨짚는 ‘경남’(김태우)에게 이런 말을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그냥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세요.” 난 늘 더 나은 삶을 갈구하지만, 그래서 목놓아 뭔가를 주장하지만 언제나 잘 알지 못하는 처지다. 이해도 못 할 책을 보면서 아는 척할 뿐이지, 딱 아는 만큼만 말하지 못해 실수 연발이다.

시대가 지목하는 거대한 흐름이 있다. 젠더, 페미니즘, 난민 등 소수자에 관한 논의는 이제 멈출 수도, 거스를 수도 없는 시류다. 김지혜 작가는 <선량한 차별주의자> 말미에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인용한다.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을 성찰하고 습관과 태도를 바꾸어야 할” 책임을 말하는 대목이다. 작가는 이 말에 대해 “내가 모르고 한 차별에 대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몰랐다' '네가 예민하다'는 방어보다는, 더 잘 알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성찰의 계기로 삼자”며 제안한다. 내가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으며 불편했던 건, 내 민낯을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름 누군가의 감정을 살피고, 섬세한 태도를 지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쩌면 이 책을 읽길 부담스러워했던 이유도 또 얼마나 많은 걸 의식하며 살라고 잔소리할까, 하는 게으름이 발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은연중에 내가 초라해질까 봐, 내 무디고 무심한 내 일상이 도마 위에 오를지 몰라 불안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라는 말이 가진 폭력성을 알면서도 기어코 선의를 내세웠으니까. 나 자신이 차별과 폭력이 만연한 사회의 엄연한 일원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대화에 섬세하지 못하면 많은 걸 놓치고 산다. 결국 모든 판가름은 섬세함에 있다. 악마도 정교함에 있고, 상황을 가늠하는 예민한 감각 없이 문학은 성립할 수 없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첨예한 문제를 다루고 있어 선뜻 받아들이기에 쉽지 않다. 누구나 부담스러워하는 사안을 적시하는 글을 쓰기란 얼마나 지난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간결하게 정리했다. 일종의 개론서처럼 쉽지 않은 내용을 흥미 위주로 풀어냈다. 무엇보다 누구도 불편하지 않도록 모서리를 뭉뚝하게 다듬었다. 오해를 부르지 않도록 첨예한 사항은 비켜가고,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에 집중한다. 답을 쥐여줘야 하는 부분에선 단호했다. 작가는 굳이 왜 그렇게까지 차별에 신경 써야 하는지에 관한 물음에 이런 말을 남긴다. "고정된 '옳은' 삶을 규정하지 않는 이 해체의 시대가 버겁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는 인류가 지속해서 갈구하는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거대한 정의를 부르짖는 말에 현혹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일상의 작은 것에서부터 위엄을 찾으려고 애쓴다. 지금 눈앞에 닥친 건 출근길이고,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회의 석상에서 마주할 동료가 엄연한 현실이다. 우선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누군가 말을 시작하면 자르기 바쁜 성미를 죽이고, 팔짱을 풀고 들어 봐야 마땅하다. 난 잘 알지 못하니까. 대의를 우러르는 시퍼런 젊음도 중요하지만, 귀찮고 거슬려도 누군가의 고통을 들어보려는 끈덕진 태도를 동경한다. 내 맘처럼 돌아가지 않는 이 도시에서 제대로 생각하고 살 수 있기를 염원한다.

 

<나쁜 페미니스트>(2016)

누구나 그렇겠지만 작가는 언어가 가진 힘을 두려워한다. 토씨 하나 틀린 문장이 주는 파급을 잘 안다. 작가는 책을 출간하기 전에 수 없는 교정을 거친다. 읽고 또 읽고, 문장과 단어 하나 하나 의미를 따져가며 정확하게 쓰려고 혼 힘을 쏟는다. 비문을 쳐내고, 부사와 형용사로 더럽혀진 길을 청소한다. 한국 문단의 전설 ‘이청준’ 작가는 전 생애를 걸쳐 대표작 <당신들의 천국>을 교정했다. 쇄를 거듭하고 개정판이 나올 때마다 메스를 들이댔다. 모두가 인정하는 역작을 내놓고도 고칠 구석을 발견했다. 본체 글 자체가 추상적인 마음을 모사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아무리 용을 써도 빗나가기 마련이다. 언어의 불완전성은 도리어 ‘언어 결정론’의 작동 원리고, 언어가 가진 결과 흠이 사람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 표출한다. 그래서 작가는 말을 겁낸다. 즉흥성이 괴물처럼 도사리는 소굴에 들어가길 꺼린다. 그렇다면 말을 해도 위험이 덜한 수단을 찾아야 할 터다. 그래서 요즘 작가들은 자신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강연을 택한다. 유튜브가 발달하면서 강연은 안방에서 시청할 수 있는 컨텐츠가 되었다. 한국의 김영하 작가처럼 글뿐만 아니라, 말 잘하는 작가들이 잘 나가는 시대다.

작가 ‘록산 게이’는 <나쁜 페미니스트> <헝거>를 통해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랐다. 난 그녀의 당당한 태도와 유머러스한 말투를 좋아한다. 그녀는 글을 끝내주게 쓰지만, 무엇보다 말을 할 때 신뢰를 얻어낸다. 타고난 강연자인 셈이다. 난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신뢰와 호감을 얻는 그를 시샘한다. 내가 본 강연은 그의 저서 <나쁜 페미니스트>를 요약한 내용이었다. 마치 족집게 강사처럼 책이 가진 컨셉을 한눈에 정리해준다. 누구나 꺼내기 불편해하는 소재를 능숙한 유머와 멋들어진 묘사를 통해 광장으로 이끌어낸다.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손사래부터 치는 사람이 있다. 록산 게이는 그 손사래 속에 "난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 사람이 아니에요 저 그쪽에 관해 지식이 없어요"라는 뉘앙스를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페미니스트라면 왠지 남자에 반감을 갖고 사회에 일갈하는 이미지가 덧씌워진다. 뭔가 아는 척하는 것 같고, 권위 있는 딱딱한 말을 보태야 한다는 부담을 갖는다. 이는 페미니즘을 하나의 자격으로 끌어올려 문제를 어렵게 한다. 마치 잘나고 뛰어나지 않으면 페미니스트를 할 수 없다는 그릇된 인식을 준다. 한국만 해도 페미니스트에 온갖 잣대를 들이댄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자청한 이가 뭐라도 실수하면 비난하기 일쑤다. ‘지 인생이나 똑바로 살고 페미니스트 노릇을 해야지 쯧쯧.’ 하지만 누구도 왜 페미니스트가 한 개인의 과오와 같은 선상에서 다뤄져야 하는지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마치 자신이 페미니즘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한다. 록산 게이는 말한다. 누구나 페미니스트일 수 있고, 누구나 허언을 뱉을 수 있다. 흘리고 사는 게 인간이고 페미니스트라고 거기에 예외일 수 없다. 당위를 자격으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페미니즘이라는 삶의 양태를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다가가기 위해 터놓고 얘기해야 마땅하다. 페미니스트를 마치 사회 혼란을 야기하는 존재로 취급한다면 이보다 더 복잡한 담론을 어떻게 입에 올릴 수 있을까?

<나쁜 페미니스트>는 책은 ‘나쁜’ 보다는 ‘미숙한’에 방점이 찍혀 있다. ‘나빠도 괜찮아’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페미니즘을 화두로 끌어올 수 있다. 물론 지금도 시대의 과제로 페미니즘이 공개된 장소에서 다뤄지지만, 터놓고 얘기하는 자리에선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건 사실이다. 인터넷 전쟁이라는 말을 서태지가 가사에 쓴지도 이제 15년이 넘어갔다. 전쟁은 지금도 한창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전장은 역시 젠더와 세대의 영역이다. 먹고 살기가 팍팍해서인지 여성 혐오와 남성의 박탈감이 만연하다. 노인을 혐오하고 청년은 기득권에 피해의식을 가진다. 한남충, 김치녀가 국어사전에 올라가도 될 만큼 보편 용례로 자리 잡은 지금, 우리는 어떻게 매일 아침 사무실에서 상대 눈을 마주하며 얘기할 수 있을까? LGBTI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기겁을 하면서, 어떻게 스스로 성 정체성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나? 서툴러도 괜찮으니 편하게 얘기해야 마땅하다. 록산 게이는 쉽고 단호히 세태를 적시한다.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