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 조지워싱턴대의 역사학 교수가 자신의 인종 정체성을 속여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를 전공한 자신의 학문 활동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블로그나 자신을 소개할 때 적극적으로 자신을 카리브해 출신의 흑인이라 속여 왔지만, 사실은 금발의 백인 유대인이라 스스로 밝히면서 학교 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미국 사회에서 인종 정체성은 꽤나 예민하고 중대한 문제인데, 재즈계에도 인종 정체성 때문에 논란이 되었던 사례가 있었다. 재즈 피아노의 거장 키스 자렛(Keith Jarrett) 얘기다. 그는 젊은 시절 흑인인지 백인인지 논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스스로 이를 명확히 밝히지 않아 이 논란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키스 자렛(1980년)

1960년대 중반 버클리 음대를 졸업한 피아노 신동 키스 자렛이 뉴욕에 진출하자, 아트 블레키, 찰스 로이드, 마일스 데이비스 같은 재즈 거장들이 그의 창의적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의 밴드로 영입하려고 애썼다. 나이 서른이 되기 전에 자신의 음반을 내기 시작했고, 솔로 피아니스트로서 일찍이 입지를 다졌다. 동료나 팬들은 검은색의 곱슬머리였던 그의 용모로 보아 그가 밝은 색 피부를 가진 흑인일 것으로 지레짐작했고, 흑인이 대세이자 다수였던 재즈 커뮤니티에서 그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슬로베니아-헝가리계 어머니와 독일계 아버지를 둔 유럽계 백인이었다.

키스 자렛의 아버지와 어머니(1940년대 후반)

인종 문제가 예민한 사회적 이슈였던 1960년대 미국 사회였지만, 재즈 커뮤니티는 반대로 백인 뮤지션에 대한 은근한 역차별이 있었다. 대부분의 재즈 스타나 재즈 팬들은 흑인이 다수였고, 백인 뮤지션들은 텃세를 감수할 수밖에 없던 소수였다. 재즈 음악은 흑인 문화의 산물이었고 흑인만이 진정한 재즈 음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했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의 피아니스트로 고용된 빌 에반스는 공연장에서 흑인 청중의 야유와 위협을 감수해야 했던 시기였다.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의 26세의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1971)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키스 자렛이나 그의 레코드 회사는 굳이 백인이라 명확히 밝히지 않고 인종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편이 차라리 팬덤 형성이나 음반 판매에 도움이 되리라 여겼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데뷔 무렵 음반 재킷에는 유난히 흑인 같은 그의 용모를 전면에 내세운 재킷 사진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음반사를 미국계 애틀랜틱에서 독일계 ECM으로 옮긴 후에는 앨범 재킷에서 그의 사진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그런 주장을 반증하기도 한다.

키스 자렛의 초기 음반 <Life Between the Exit Signs>(1967)와 <Restoration Ruin>(1968)

후일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인종적 모호성이 자신의 성공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란 사실을 인정한 바 있다. 자신이 백인이라는 사실이 많이 퍼진 이후의 한 음악 페스티벌에서는 흑인 운동가들로부터 자신이 흑인 음악을 이용하고 있다는 항의 데모가 벌어진 적도 있었다. 결국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의 모호함 덕분에 1970년대 퓨전 음악이 빠르게 발전하던 시기에 가스펠이나 재즈, 그리고 펑크 같은 흑인 음악에 연계된 음악 스타일을 별다른 거부감없이 개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자악기를 선보인 마일스 데이비스 콤보의 Isle of Wight Festival(1970) 38분 공연. 키보드를 연주하는 키스 자렛과 칙 코리아를 볼 수 있다

그의 인종적 정체성과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함께 무대에 섰던 프리재즈 명인 오넷 콜맨이 그와 함께 협연한 후 무대 뒤로 돌아와 “세상에, 너는 흑인일 수밖에 없어. 분명 흑인일 거야.”라며 놀라워했고, 이에 대해 키스 자렛은 “나도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야”라 응수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