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막길로 굴러떨어지는 유리병을 본다. 덜컹덜컹 뾰족한 돌조각들에 몸이 긁혀 투명함이 탁해지는 작은 유리병은 어느 순간 더욱더 가파른 경사를 만나 온몸에 길고 닦여지지 않는 생채기가 난다. 상처투성이가 된 유리병은 드디어 평지를 만나 정지된 평화를 꿈꾸지만 깨질듯한 비명과 함께 몸이 조각난다. 조각난 비극은 조용한 소멸이 되지 못하고 밟거나 스친 자를 해치고 스스로 더욱 으스러진다. 실패한 사랑이란 자신을 부수고 타인을 해치는 위태로운 레이스다. 그 타인은 남이 된 지난 사랑일까? 혹은 그 사랑에서 빠져나와 나와 상관없어진 관계를 바라보는 나일까?

<stage&FLO>에 출연한 아티스트 중에도 많은 아티스트들이 사랑의 슬픔과 공허함, 외로움에 대해 가사를 읊었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우리의 실패한 사랑이란 남루한 기억 속 잔상 같은 여운이 있다.

 

1. 김사월 ‘우리’

너와 내가 서로의 눈을 마주치고 웃었을 때 끝이란 단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그 당시엔 마냥 갓 태어난 아이 같아서 서로를 하나하나 배워가던 시기였기에 우리는 미움이란 단어를 몰랐다. 우리는 무언가를 미워할 순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우린 미움이란 마치 알게 되면 죽음을 맞이하는 주문 같은 것이라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없고 새로운 사랑조차 할 수 없을 것 같다. 사랑의 끝은 결국 미움으로 끝나니까.

'우리'란 제목과는 달리 아이러니하게 우리는 함께가 아닌 언제 어디서 헤어질지 모를 것이라고, 언제나 사랑에 실패했다고 말하는 김사월의 노래다. 우리의 미래엔 영원히 지속적인 사랑이란 것이 존재할까? 영상을 촬영 내내 모든 스태프가 숨소리조차 틀어막으며 그의 입술과, 손끝, 발동작에 집중했던 김사월의 아름다운 라이브.

“우린 헤어질 사람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이제는 우리 서로가 없는 곳에서 울어야 해 이제는 우리 서로가 없는 곳에서 울어야 해 우리가 좋아했던 것들 다 지워버려도 되겠니” - 김사월 ‘우리’ 중에서

 

2. 위아더나잇 ‘돌멩이’

어느덧 여름이 저물고 가을의 서늘한 촉감이 여름의 잔여물 사이에 스쳐 다가온다. 지독하고 강렬했던 사랑이 계절의 흐름처럼 급작스럽게 식어버리고, 불꽃놀이 같던 설렘이 어두운 하늘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제 또다시 누군가를 향해 마음을 터트릴 수 있을까? 혹은 또다시 터진 그 마음이 불꽃 잔상처럼 외로이 홀로 하늘을 수놓다 사라지는 건 아닐까? 한때 그 불꽃이 진짜 밤하늘의 별이라고 믿었던 우리의, 아니 나 혼자의 믿음은 다신 하늘로 갈 수 없는 무거운 돌멩이가 됐다.

위아더나잇의 '돌멩이'를 듣고 있자면 잔인하게 실패한 사랑조차 예쁜 색으로 덧칠하여 다시 한번 그때로 돌아가고 싶게 만드는 안타깝고 외로운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혹은 당장 내일이라도 새로운 사람에게 '사랑해'라고 말하곤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정처 없이 달려가고 싶은 모순적 감정이 든다. 촬영 내내 머릿속에 여름밤의 판타지를 그려준 위아더나잇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마음이 떨리고 폭죽 같은 이 밤이 터져요 표정을 바꾸고 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아요 자 떠나요 마음이 열리고 폭죽 같은 이 밤이 커져요 눈물이 번지고 사랑도 챙겨가도록 해요 잘 숨겨요” - 위아더나잇 ‘돌멩이’ 중에서

 

3. 정우 ‘연가’

사랑이 끝났다. 한 달이고 1년이고 시간이 흐른 후 문득 우리는 남루한 사랑의 기억 속에 잔상처럼 남은 사랑의 잔여물의 지워진 형태를 기억하고자 '사랑'에 관한 음악을 튼다. 자발적으로 실패한 사랑의 기억을 찾는 우리는 자학적이고도 괴상한 본능을 타고 난 생물일지도 모른다.

그 당시 당신이 나를 아무리 밀어내도, 나에게 관심이 없어도, 나를 미워했어도, 혹은 기적적으로 사랑해주었어도, 당신이 어떤 감정을 지녔다 해도 나는 당신을 나 생에 온 사명처럼 사랑했을 것이다. 오래전 내 인생이 온통 사랑으로 물들었던 지난 날들을 추억하게 하는 정우의 '연가'. 그의 담담한 목소리는 아팠던 추억도 덤덤하게 꺼내게 하는 힘이 있다.

“넝마 같은 당신을 붙입니다 떨어진 마음도 줍습니다 당신 좋은 사람이 아니래도 나 멋대로 실망하지 않아요 넝마 같은 우릴 여밉니다 벌어진 그 날을 붙입니다” - 정우 ‘연가’ 중에서

 

4. 데이먼스 이어 ‘체리’

데이먼스 이어의 사랑은 분명 사랑하고 둘이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외로움, 그사람 곁의 나를 무채색으로 물들이는 짙은 외로움을 노래한다. 이 세상에 온전히 나의 것이 될 수 있는 타인의 감정이란 것이 존재할까? 달콤하지만 공허한 사랑의 고독, 열심히 유영해도 끝을 알 수 없어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어두컴컴한 우주 같은 우리들의 사랑. 데이먼스 이어의 신곡 'Cherry'를 듣는 순간 떠오른 소설 구절이 있다.

“나는 그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멋진 여행의 동반자이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두 개의 위성이 그려내는 궤도가 우연히 겹쳐질 때 우리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죠. 또한 마음을 합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잠깐, 다음 순간에는 다시 절대적인 고독의 틀 안에 갇히게 되는 거예요. 언젠가 완전히 연소되어 제로가 될 때까지 말이에요.” - 무라카미 하루키 <스푸트니크의 연인> 중에서

“난 정말 바보 넌 사랑은 지겹다고 죽은 날 두고 떠났지 취한 노래는 꺼졌고 네 기억이 나질 않아 넌 사랑을 찾는다고 내 집을 다시 찾았지 넌 불리한 건 쉽게 지우나 봐” - 데이먼스이어 ‘체리’ 중에서

 

* FLO app과 Cakepop 유튜브에서 스테이지앤플로 영상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Writer

음악 콘텐츠 기획자, 하루키스트, Psychedelic rock. <중경삼림>의 영원한 팬. 읽고 듣고 보고 쓰는 것들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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