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전까지 비디오 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2만여 편의 영화들을 섭렵해 온 영화광 타란티노는 자신이 좋아하는 과거의 B급 영화들의 스타일을 빌려와 자기 식대로 새롭게 벼려냈다. 데뷔 직후부터 현재까지 세상은 그의 영화를 열렬히 지지했고, 지난 30년 동안 그에게는 '헤모글로빈의 시인', 'B급을 재료로 A급 영화를 만드는 감독' 등의 수식어가 붙었다. 그의 영화들은 한결같이 자극적이지만, 그 폭력과 즐거움 아래에는 비디오 가게 시네필의 영화에 대한 치밀한 탐구가 깃들어 있다. 오늘은 작가주의 감독으로서의 타란티노의 면모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저수지의 개들>

‘죠 캐봇’(로렌스 티에니)과 그의 아들 ‘나이스 가이 에디’(크리스 펜)가 6명의 갱들을 텅 빈 창고에 모은다. 두 사람은 다이아몬드 도매상 강도 계획을 6명의 갱에게 전달한다. 보석 강도 성공 직후, 문 밖에는 이미 수많은 경찰이 대기하고 있었고, 간신히 경찰을 피해 도망가는 데 성공한 ‘마스터 화이트’(하비 케이틀)와 ‘미스터 오렌지’(팀 로스)는 강도 후에 만나기로 약속된 장소인 창고로 향한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영화사에서 오손 웰즈와 장 뤽 고다르 이후 가장 충격적이라고 칭할만한 데뷔작을 선보인 감독이다. <저수지의 개들>이 세상에 안겨준 충격은 서사의 독특한 진행방식에서 비롯된다. <저수지의 개들>의 줄거리는 도둑들을 모아서 보석상을 털고 도망친 후, 그들 중 누가 비밀경찰이었는지 찾아낸다는 단순하고 익숙한 이야기지만 타란티노는 누구도 시도한 적 없는 방식으로 이 이야기를 풀어낸다.

오프닝 시퀀스에서는 영화 내용과는 아무 관련 없는 대화를 주욱 늘어놓는다. 오프닝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도둑 중 한 명이 차 안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본작은 도둑들이 보석상을 털러 가는 장면은 아예 생략해버린 채, 보석을 털고 난 직후의 차 안에서 시작해버린다. 범죄 이후에 만나기로 미리 정해놓은 장소에 도둑들이 한 명씩 도착하고, 그럴 때마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마음대로 왔다 갔다하며 진행된다.

<저수지의 개들> 트레일러

의미 없는 오프닝 대화 장면에서 알 수 있듯, 타란티노의 영화는 모든 장면이 반드시 영화의 서사에 헌신하지 않는다.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오직 ‘모든 장면이 어떻게 관객의 즐거움을 자극해낼 수 있는가?’이다. 타란티노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는 대사다. 그는 무엇보다 대사 자체를 잘 쓴다. 의미 없는 대화로 채운 오프닝도, 제 멋대로인 작품 전체의 진행도 관객에게 즐거움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대사들이 영화 속 매 순간순간을 지루할 일 없게 하기 때문이다.

 

<펄프픽션>

갱단 ‘빈센트’(존 트라볼타)는 ‘쥴스’(사무엘 L.잭슨)와 함께 두목 ‘마르세러스’(빙 라메스)의 금가방을 찾으러 다른 건달의 집으로 찾아간다. 건달 일당을 죽이고 인질을 데려오던 도중, 줄스가 실수로 인질을 총으로 쏴버리면서, 두 사람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 한편 복싱선수 ‘부치’(존 트라볼타)는 마르셀러스에게 일부러 상대 선수에게 져줄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상대 선수를 죽여버린다. 이에 마르셀러스는 빈센트에게 부치를 뒤쫓을 것을 명령한다.

<저수지의 개들>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쿠엔틴 타란티노는 두 번째 작품 <펄프픽션>을 통해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다. <펄프픽션>은 영화사적으로 뛰어난 가치가 있는 작품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영화적 재미로도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었다. 평단과 영화제뿐만 아니라 대중들도 <펄프픽션>과 타란티노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펄프픽션> 트레일러

<펄프픽션> 속의 세 에피소드는 기묘하게 얽혀있다. 한 이야기에선 주인공인 이가 다른 이야기에선 그저 지나가다 죽음에 이르는 사소한 인물이 되기도 한다. 모든 대사에 의미가 있는 건 않지만 각 대사는 그 자체로 즐거움을 주고, 중요한 요소인 듯 보였던 물건은 사실 맥거핀에 불과하다. 세 이야기가 기묘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얽혀 진행되는 독특한 내러티브는 이전의 어떤 영화에서도 본 적 없던 새로운 시도였고, <펄프픽션>은 이후의 모든 영화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킬 빌>

살인 청부 요원이었던 ‘더 브라이드’(우마 서먼)은 자신이 임신했음을 알고 과거를 청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식장에 찾아온 그녀의 이전 조직원들은 신랑과 하객을 모조리 살해하고, 더 브라이드를 혼수상태에 빠뜨린다. 5년 후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더 브라이드는 조직의 보스인 ‘빌’(데이빗 캐러딘)을 비롯한 5명의 조직원을 한 명씩 찾아가 복수하기 시작한다.

<킬 빌>은 타란티노가 21세기에 연출한 첫 번째 작품이다. 21세기 영화의 주요한 변화 중 하나는 대중문화의 레퍼런스를 차용하는 방식이다. 대표적으로 워쇼스키 자매의 1999년작 <매트릭스>는 대중문화의 전반에 깔린 수많은 레퍼런스를 재조합하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스타일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전작에서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과거의 장르를 가져와 자신의 방식으로 비트는 것을 즐겨왔던 타란티노 역시 <킬 빌>을 통해 자신이 좋아했던 수많은 영화의 레퍼런스를 뒤섞어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영화의 전체를 관통하는 스타일은 일본 사무라이 활극과 홍콩 무협영화에서 빌려왔고, 중간중간에 호러, 웨스턴, 블랙 익스플로이테이션 등 과거에 유행했던 B급 영화 장르들을 인용했다. 심지어 1부의 한 부분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킬 빌>은 이소룡의 도복과 사무라이의 검, 홍콩의 무술 등 분명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로만 구성되어 있지만,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독특한 스타일의 영화로 다가올 것이다.

<킬 빌 – 1부> 트레일러

처음에는 한 편의 영화로 기획되었지만, 러닝타임이 지나치게 길어지면서 두 편의 독립된 영화로 나뉘어 개봉했다. 1부에서는 일본 사무라이 액션의 분위기가 더욱 강하고, 장면의 분배는 많은 대사보다는 액션에 더욱 치중했다. 1 vs 88의 단체 전투 장면은 본작의 백미. 2부는 홍콩 무협 영화 스타일을 주로 차용하고, 타란티노의 장기인 대사의 재미에 더욱 치중한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나치 점령 프랑스의 시골 농가 지하에는 유대인 가족들이 숨어서 살고 있다. 집을 수색하러 온 나치 친위대 대령 ‘한스 란다’(크리스토프 왈츠)는 장녀 ‘쇼산나’(멜라니 로랑)을 제외한 가족들을 모두 살해한다. 한편, 미군 소속 유대인 ‘알도 레인’ 중위(브래드 피트)는 다른 유대계 미국인들을 모아 나치들을 죽이는 '바스터즈'라는 이름의 조직을 만든다. 쇼산나와 바스터즈는 각자의 방식으로 나치에 대한 복수를 준비한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은 최근 타란티노 영화들의 스타일을 모두 담고 있다. 초중반에는 서스펜스를 직조하는 탁월한 능력이 두드러진다. 서스펜스를 통해 영화 속 중요한 두 번의 작은 정점을 만들어내는데, 상황과 대화를 통해 긴장감을 여러번 고조시키고 이완시키면서 긴 시간동안 관객들의 감정을 붙잡아 두는 데 성공한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트레일러

후반부에서는 작품 속의 모든 인물을 불러모아, 한 곳에서 잔인하게 처형한다. 폭력의 본질적 즐거움과 카타르시스는 최대한으로 하면서, 도덕적인 불편함은 없애기 위해 최근의 타란티노는 역사 속 누구나 인정하는 사악한 존재들을 그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 태도를 보인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후반부에서는 나치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연출하면서 폭력의 카타르시스를 확실하게 선사한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1969년 할리우드, 한물 간 TV 서부극 배우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옆집에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과 그의 아내 ‘샤론 테이트’(마고 로비)가 살고 있다. 오랜 시간 릭 달튼과 함께한 스턴트맨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가 릭 달튼의 집에 놀러온 날 밤, 로만 폴란스키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사회와 영화에 앙심을 품은 히피 일당들이 범죄를 시도한다.

코엔 형제에게는 <헤일, 시저>, 마틴 스콜세지에게는 <휴고>가 그랬듯이, 이 작품은 거장 감독이 영화라는 예술에 바치는 헌정시와 같다. 영화를 예찬하는 대부분의 작품이 영화사의 전성기라 불릴만한 시기를 다루지만 본작은 미국과 할리우드 모두 변화의 바람으로 혼란스러웠던 60년대 말을 택했다. 타란티노는 마냥 행복하지 않았던 시기를 밝게 표현하고 할리우드 사상 최악의 사고였던 찰리 맨슨 사건에 다른 결말을 부여하면서 영화와 할리우드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낸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트레일러

배경은 할리우드로 옮겨왔고,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다른 작품들보다 감상적이지만, 풀어내는 방식은 여전히 타란티노스럽다. 결말에서 폭력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카타르시스를 최대한으로 선사하는 모습, 특유의 흡입력 있는 대사들, 중간중간 서스펜스를 활용하는 능력까지 영화 전반에 그의 특징이 확실하게 묻어 있다. 타란티노의 연출 실력이 본작에서 정점에 이르렀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 타란티노는 관객의 눈이 머무는 위치를 의도적으로 혼란스럽게 하거나 부드럽게 이어붙이면서 관객의 눈을 갖고 노는 경지에 이르렀다.

 

Writer

좋아하는 건 오직 영화 뿐이고 특히 68혁명 이전까지의 고다르 영화에 대한 광적인 팬이다. 스스로가 언젠가 대단한 일을 해낼 거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