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유니버스>의 오프닝 장면. 좌로부터 펄, 가넷, 스티븐, 애머시스트

옅은 분홍색 하늘에 크림색 구름이 가벼이 떠다닌다. 바다는 해변으로 소다색 파도를 부드럽게 밀어 올린다. 작은 바닷가 도시 ‘비치시티’에는 소박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산다. 파스텔 색조로 만들어진 카툰 네트워크(Cartoon Network, 미국 애니메이션 채널)의 <스티븐 유니버스(Steven Universe)>(2013~) 속 지구에서 악한 존재를 찾아보기란 퍽 어려운 일이다. 검은 곱슬머리의 개구쟁이 ‘스티븐’이 성장해가는 이 가상의 지구는 사려 깊은 세계다. 이해하기 어려운 남의 행동 앞에서 “그래, 너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건, 존재에 대한 선한 믿음 덕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꼬마 스티븐은 매사에 여유가 넘친다. 그가 가진 세계에 대한 신뢰와 여유로운 성격은, 좋은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 덕분에 오랜 시간 굳게 다져진 것이다.

한편 우주의 외계 행성 ‘홈월드’의 ‘젬(Gems,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의 실체는 보석과 광물로 만들어졌다. 3명의 다이아몬드를 지배자로 둔 계급사회를 이루고 산다)’들로부터 지구를 지키려 노력하는 세 명의 외계 존재 ‘크리스털 젬(Crystal Gems, 지구를 침략하는 홈월드에 맞서 싸우는 반란군)’ ‘가넷’과 ‘펄’, ‘애머시스트’는 스티븐과 친구이면서도 가족과 유사한 관계를 맺고 있다. 스티븐의 아빠인 ‘그렉 유니버스’와 비치시티의 선한 이웃들도 크리스털 젬들처럼 스티븐의 상냥한 세계를 든든하게 지탱한다. 하지만 홈월드의 젬들이 침략 계획에 박차를 가하고, 스티븐의 탄생과 크리스털 젬들을 둘러싼 미스터리들이 정체를 드러내면서 스티븐이 익숙하던 세계에 균열이 일어난다. 성장이 시작되는 것이다.

카툰 네트워크가 공개한 클립 <Steven Goes to Korea(스티븐 한국에 가다)>. 한국에 대한 현실적인 묘사로 화제를 모았다. 팬들 사이에서는 이들이 향한 곳이 북한산이라는 추측도 돌았다. 감독인 리베카 슈거가 케이팝의 팬일 뿐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두 업체가 한국에 있어, 프로그램의 크레딧에서 한국인의 이름을 찾기가 어렵지 않다

잘 만들어진 성장담들은 대개 주인공의 심리적 묘사를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드러낸 경우가 많다. 영화 <괴물들이 사는 나라>(스파이크 존즈, 2009), <판의 미로>(기예르모 델 토로, 2006)는 하나의 작은 인간이 생애 최초로 만난 비정한 고난을 다양한 알레고리와 판타지적 세계관 속에서 성공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다. <스티븐 유니버스> 또한 인물들의 내밀한 성장 과정을 판타지에 녹였지만, 그 세계에 현재진행형으로 억압받는 소수자들을 전면으로 내세웠다는 점이 작품의 혁신적인 면이다. 특히 ‘젬’ 종족의 모든 성별은 여성(she)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이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개인적 고통은 현실의 비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악인, 억압의 주체, 파괴와 침략을 일삼는 캐릭터들마저 여성으로 꽉꽉 채워진 이 세계는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여성과 소수자들을 ‘인간’이라는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 놓는다.

극 중에서 가넷이 부른 삽입곡 ‘Stronger Than You’ 공식 클립. 화려한 성우진도 제작 초기부터 이목을 끌었다. 주요 캐릭터인 가넷 역할을 맡은 영국 출신 팝스타 에스텔(Estelle)을 비롯, 에이미 만(Aimee Mann), 니키 미나즈(Nicki Minaj), 리사 해니건(Lisa Hannigan) 같은 가수들과 알렉시아 카딤(Alexia Khadime), 패티 루폰(Patti LuPone) 같은 브로드웨이 스타, 우조 아두바(Uzo Aduba), 나타샤 리온(Natasha Lyonne)를 비롯한 배우까지 다양한 스타들이 새로운 캐릭터와 함께 카메오로 등장하였다

이 작품의 강점은 이러한 비전형적 세계관과 캐릭터들의 깊이 있는 묘사에서 비롯한다. 첫 번째 시즌 초반에는 어쩔 수 없이 각 캐릭터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삽화들 속에서 다소 평면적으로 등장했지만, 이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드러나는 캐릭터들의 밀도 높은 내면 묘사는 10분에서 20분 사이의 짧은 방영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여운을 남긴다. 당연히 이 세계 속 인물들은 여성과 남성으로 분리된 성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없으므로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과 성찰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현실에서의 그것보다 훨씬 넓다. 인종, 성별, 계급에 대한 차별과 그에 대한 투쟁은 인간 보편의 존엄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출생 혹은 존재의 비밀과 운명적 역경, 시련의 극복이라는 우리가 잘 아는 영웅의 무용담을 수반하고, 이는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익숙한 틀거리로도 활용되었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영웅이 단 한 사람의 자리로만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은 <스티븐 유니버스>의 고유한 미덕이다.

스티븐의 부모인 로즈와 그렉의 ‘What Can I Do For You’ 합주 장면. 영상의 후반부에 두 젬의 퓨전 장면이 등장한다. ‘퓨전’은 극 중에서 둘 이상의 젬이 정신적, 신체적 파동을 맞춰 또 다른 새로운 젬으로 변신하는 것을 일컫는데, 홈월드에서는 전투용 목적이 아닌 퓨전을 금하고 그 외의 목적으로 퓨전한 젬들은 괴짜로 취급한다

존중과 자기 긍정의 메시지를 사랑으로 감싸 능란하게 펼쳐내는 이 작품의 제작자는 1989년생 여성인 리베카 슈거(Rebecca Sugar)다. 그는 카툰 네트워크의 간판 프로그램 <핀과 제이크의 어드벤처 타임(Adventure Time)>(2001~) 제작에 참여하여 이름을 알렸다. 각본뿐 아니라 작곡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던 그가 2013년 <핀과 제이크의 어드벤처 타임> 제작팀에서 나와 만든 <스티븐 유니버스>는, 카툰 네트워크 역사에 여성 총감독이 만든 첫 번째 작품으로 기록되었다. 리베카 슈거는 자신의 첫 제작 장편 작품 속에 자신이 사는 세계와 주변 인물들의 여러 측면을 담아내면서, 구체성과 개성이라는 목표를 동시에 달성했다. 평소 우쿨렐레를 치며 작곡과 노래를 즐기고 장난기 많은 자신의 중성적인 면은 스티브와 그렉 속에 흩뿌렸고, 동시에 자신의 가족들도 모델로 삼았다. 비치시티라는 동네의 모습도 어릴 적 자신이 살았던 해변 소도시의 풍광을 재창조한 것이다. 주요 캐릭터 외에 애니메이션 속에 등장하는 그래픽들은 거의 레퍼런스의 폭발이라고 할 정도로 다양하다. 일본 만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모에화(특정 대상을 호감을 얻도록 의인화)된 캐릭터와 과장된 순정만화 풍의 인물 묘사, 극 중 ‘엠파이어 시티’(뉴욕을 모티프로 함)로 불리는 그래픽 노블 풍의 공간 묘사, 향수를 자극하는 디즈니와 유럽 만화의 영향까지 셀 수 없이 다양한 취향, 영향들이 포진해 있다. 이는 케이팝(K-Pop)과 일본 만화 팬인 리베카 슈거의 영향이며, 인터넷 세대인 동료 창작자들과 공유하는 동시대적 감각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엠파이어 시티를 배경으로 한 장면. 삽입곡은 리베카 슈거가 작곡한 ‘It’s Over, Isn’t It?’이다. <핀과 제이크의 어드벤처 타임>에서 리베카 슈거가 만든 음악들이 인기가 많았던 만큼, <스티븐 유니버스>에서도 음악이 화제가 되었다. 리베카 슈거와 함께 부부 듀오 아이비 앤 스라슈(Aivi & Surasshu)가 만든 음악은 <스티븐 유니버스>의 세계를 완성하는 결정적 요소 중 하나다

또 리베카 슈거는 2016년 공식적으로 커밍아웃한 성 소수자다. 만약 지금 한국에서 인기 있는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총괄자가 20대 여성이라면, 게다가 성 소수자임을 공공연히 밝히기까지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런 정보를 밝히는 것만으로 보이콧 소동이 벌어졌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성장담인 <스티븐 유니버스>에서 정체성의 문제는 주요한 주제이고, 리베카 슈거의 커밍아웃에 현지 팬들은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반은 젬, 반은 인간이자 남성인 스티븐처럼 다층적인 정체성을 가진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혼란스러운 상황에 자주 처하고 곤란을 겪는다. 이때 <스티븐 유니버스>의 세계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너는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는 것이다. 이런 메시지에 감응하는 사람들이 비단 여성이나 성 소수자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연방대법원의 동성혼인 합헌 결정으로 상징되는 미국 사회의 분위기도 참조해야겠지만, '오바마 시대'가 저문 2017년에도 <스티븐 유니버스>는 인기리에 방영 중이다. 어린 시절 <스티븐 유니버스>에 열광하며 자라난 세대들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놀랍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스티븐 유니버스>는 한국 카툰 네트워크에서도 일부를 더빙판으로 방영했다. 다만 2시즌에서 방영이 멈춰진 상태인데, 그 이유는 알기 어렵다.

매사에 부정적인 ‘페리도트’와 스티브가 처음으로 함께 노래 ‘Peace and Love(On Planet Earth)’를 만들어 부른다. 캐릭터의 성장과 변화를 보여주는 장면

리베카 슈거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라고 밝힌 극 중 인물은 스티브의 아빠인 그렉 유니버스다. 어쩌면 그렉이야말로 <스티븐 유니버스>에서 가장 판타지적인 캐릭터일지 모른다. 인간 남성이면서 연령, 성별, 인종, 직업, 장애 같은 대부분의 편견에 아랑곳하지 않는 놀라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스티븐의 엄마인 ‘로즈’는 240cm의 키에 변신과 싸움에 능한 외계인이지만 그렉은 로즈와 기꺼이 사랑에 빠진다. 크리스털 젬들과도 끊임없이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며 스티븐을 공동으로 육아한다. 그렉은 장사가 거의 되지 않는 세차장을 운영하며 자동차를 집으로 삼지만, 가난을 비관하거나 자신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그는 부모의 역할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어린 아들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하는 가장 좋은 친구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조차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자 외계인인 아들의 정체성을 굳이 반으로 나누려 들지 않고 그 존재 자체를 사랑할 줄 안다. 종종 샛길로 빠지고 실수를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가 완벽하다는 것을 아는 그는 분명 좋은 어른, 좋은 사람이다. 누군가를 존재 자체로 완벽한 사람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만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분명히 안다.

극 중에서 그렉 유니버스가 부른 노래 ‘Com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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