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결말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무언가 크게 이루어 보겠다는 희망을 가리켜 우리는 ‘야망’이라 부른다.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손을 뻗게 만드는 원동력답게 야망은 노력과 결합해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취감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때때로 실패를 주어 좌절감을 배로 증폭시키기도 한다. 그것이 발현한 이유와 목적을 잃은 채 오로지 승패에 매몰된 야망의 경우, 원대한 결과물을 얻었다 할지라도 다 걷어낼 수 없는 씁쓸한 허무함이 짙게 맴돌기도 한다. 러닝 타임 내내 그 어떤 영화 속 주인공들보다도 유독 반짝이는 야망을 거머쥐고 있던 이들은 무엇을 얻고 또 무엇을 잃었는가?

 

1. <미스 슬로운> - 엘리자베스 슬로운

일명 ‘히튼-해리슨 법’이라 불리는 총기 규제 강화 법안을 반대하는 정치인의 로비가 들어오자, 믿을 수 없는 승률 100%를 자랑하던 자타공인 최고의 로비스트 ‘엘리자베스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은 망설임 없이 제 발로 회사를 박차고 나간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회사와 자신의 신념이 대립한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아닌 로비스트의 시선으로 총기 규제 사안에 접근하고 있는 영화 <미스 슬로운>은 그 여느 때보다도 신념 문제에 초점을 두는 동시에 그 신념이 본질을 어떻게 희석하는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총기를 규제해야 한다고 바라보는 슬로운과 총기에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존 회사 측 사람들 모두 자신의 신념에 승리를 안기기 위해 모순적이게도 제 신념들을 안중 밖으로 내던진다. 옳고 그른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아닌 오로지 이기고 지는 승패만을 주시하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슬로운이다.

불면증에 시달리며 깨어 있는 시간을 전부 총기 규제 강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설계에 투자하는 슬로운에게 ‘인간다움’이란 해당하지 않는 성질이다. 냉혹한 로비스트 세계에서도 슬로운이 가장 돋보이는 이유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거리낌 없이 장기 말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동료라 할지라도 낭떠러지로 떠미는 것. 그것이 이곳에선 당연한 일인이 마냥 슬로운은 거침없이 승리만을 위한 작전을 펼친다.

통제하지 못한 요소들로 인해 일이 어그러졌을 때조차 슬로운은 차분히 로비에 대한 자신의 사견을 읊조린다. 로비는 통찰력을 발휘하여 상대의 움직임을 예상한 뒤 대응책을 고안하여 한 걸음 더 앞서 있어야 한다고. 그 말과 동시에 슬로운은 자기 자신조차 장기 말로 사용했음을 여실히 드러내며 자신이 최종 승리를 차지하였음을 당당히 선포한다. 잔혹한 승패의 세계에서 슬로운에게 승리란 자신이 바라는 목적이 달성하기만 한다면 자신의 명예나 위치, 그 모든 게 무너진다 해도 굳건한 승리이기에.

 

2. <더 페이버릿> – 애비게일 힐

‘애비게일’(엠마 스톤)의 푸르디푸른 눈동자가 늘 서늘함을 담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통풍으로 고생하고 있던 ‘앤’ 여왕(올리비아 콜먼)에게 약초를 따다 발라준 행동과 단둘이 남은 방에서 춤을 추며 해맑게 지어 보였던 웃음만큼은 더할 나위 없는 선량한 호의를 품고 있었으니 말이다.

독서를 좋아하고, 사냥감에조차 동정심을 품던 애비게일이 점차 권력에 손을 뻗게 된 이유는 망나니 아버지의 업보로 인해 짊어지게 된 몰락 귀족이란 타이틀과 여성이 자신을 보호하고 자립할 수 없던 사회가 현실을 상기시켜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운한 개인사와 별개로 태어날 때부터 풍족함을 거느린 앤 여왕이나 그의 절친 ‘사라’(레이첼 와이즈)와 달리 애비게일은 바닥의 참혹함을 은연 중에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 두려움을 알기에 애비게일은 살아남기 위해 점차 의도적으로 앤에게 접근하고, 유혹하기에 이른다. 애비게일에게 사랑이란 사치였으며, 애정은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으니,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용한 것은 진심보다 쉬운 복종이었다. 마침내 사라의 자리를 빼앗고 권력과 왕의 관심을 독차지한 애비게일은 제 절박함이 가져다준 승리를 만끽한다.

하지만 손에 넣을 수 있는 정상의 권력을 빼앗았다 한들 결국 최고의 권력은 왕에게 있기 마련이다. 애비게일이 그리도 피하고 싶었던 굴욕은 아직 끝난 게 아니라던 사라의 말마따나 다른 형태로, 치욕스럽게 구현된다. 결국 애비게일이 스스로 선택한 것은 그저 더 안전한 울타리에 갇힐 수 있는 재앙이었다.

 

3. <정직한 후보> – 주상숙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신뢰감을 주는 밝은 미소와 허물없는 싹싹한 성격, 그리고 청렴하고 믿음직스러운 이미지까지. 이 모든 것을 거짓말로 이룩하였던 3선 국회의원 ‘주상숙’(라미란)이 진실함을 무기 삼아 지지율을 올려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 말이 아주 완벽히 틀리지는 않은 듯 보인다.

동네 주민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살지도 않는 아파트에서 지내는 척 귀가 쇼를 벌이고, 동맹을 맺은 상대편 후보에게 쏠쏠한 주식 정보를 흘리며 바쁘게 악행을 일삼던 주상숙이 제 최대 강점을 잃어버리게 된 까닭은 우연의 산물이었다 할 수 있다. 주상숙의 할머니, ‘김옥희’(나문희)가 간절히 올린 기도가 어쩌다 보니 하늘에 닿아버린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덕분에 하필이면 한날한시가 아쉬운 선거철, 주상숙은 진실만을 내뱉는 입을 얻게 되지만 4선 당선에 대한 그의 욕망은 잃어버린 거짓말보다도 크기에, 그대로 주저앉기만 할 그가 아니다. 진실만을 말하게 된 저주에 걸렸다면, 그에 걸맞게 진정한 정직한 후보가 되어 밀고 나가면 그만이지 않은가.

교묘하게 제 잘못을 가리고 적절한 진실함으로 무장한 주상숙은 다시금 유력한 당선 후보로 승승장구하지만 그렇다 해서 모든 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으니, 이번엔 할머니의 이름을 내걸고 만든 옥희재단에서 저도 모르는 비리 의혹이 불거진다. 당선만을 위해 내달려온 그였다 할지라도 형태를 잃고 무너진 제 초심과 마주하게 되자 주상숙은 눈을 가리고 지나왔던 제가 걸어온 길들을 찬찬히 살펴보게 된다. 자신은 높은 곳을 바라보았을 뿐인데 어째서 이토록 추악하게 추락하게 된 것일까.

 

Writer

감상한 영화보다 보고 싶은 영화가 더 많아져 힘든 요즘입니다. 모쪼록 보고 싶은 것들을 전부 다 볼 수 있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