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호에 썼다시피 1980~90년대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인디 음악이 역병처럼 창궐하던 시기입니다. 그리고 전염병은 사람들이 한 곳에 많이 모일수록 쉽게 퍼지는 법이죠.

글래스고 예술 대학 근처의 소키홀 거리.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인디 음악 신을 지배했던 라이브 클럽의 보고다

서울에 홍익대학교 앞 클럽 거리가 있듯 글래스고 역시 예술학도가 많은 대학가 주변이 문화의 그라운드 제로 역할을 했습니다. 글래스고 예술 대학(Glasgow School of Art, 이하 ‘글예대’)을 중심으로 그물처럼 퍼진 거리 곳곳엔 클럽이 즐비합니다. BBC에 따르면 글예대엔 일종의 조합 차원에서 운영하는 공연장도 있었는데, 그 무대에 프란츠 퍼디난드(Franz Ferdinand), 벨앤 세바스찬(Belle And Sebastian), 틴에이지 팬클럽(Teenage Fanclub)이 서곤 했다고 합니다.

글예대 근처에는 인디의 고대부터 살아남은 전설의 클럽들이 여럿 있습니다. ‘나이스 앤 슬리지(Nice N’ Sleazy)’에는 스노우 패트롤(Snow Patrol), 모과이(Mogwai), 더 바셀린스(The Vaselines)의 족적을 찾을 수 있고, 크리에이션 레코드가 오아시스(Oasis)를 발굴한 곳으로 유명한 ‘킹 텃츠 와 와 헛(King Tut's Wah Wah Hut)’은 버브(The Verve), 블러(Blur) 등이 초창기에 올랐던 무대라고 하니, 1980~90년대에 글래스고의 인디 음악 붐이 왜 그리 폭발적으로 퍼졌는지를 설명하기엔 충분해 보입니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소키홀 스트리트(Sauchiehall Street)’는 글예대에 면해 있는 거리로, 우리 식으로 따지자면 홍대 삼거리 포차에서 우리은행 사거리에 이르는 길 정도라고 할 수 있겠네요. 양편으로 라이브 클럽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늦은 밤이 되면 공연을 끝낸 뮤지션들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역병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죠.

NME가 발표한 <C86> 앨범 카세트테이프 커버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이런 인디 붐의 초창기부터 활동했던 밴드가 바로 더 파스텔스(the Pastels)입니다. 당시의 스코틀랜드를 포함한 영국의 음악 신이 어떤 분위기였는지를 살펴보기에 적당한 앨범이 있습니다. NME에서 발표한 <C86>이라는 앨범입니다. NME에서 1986년 영국 인디 음악 지형을 축소해 보여주기 위해 디자인한 이 앨범의 특징 중 하나는 스코틀랜드 인디 신의 팝적인 색채가 강하게 드러났다는 점입니다. 카세트테이프 A면의 1번 트랙은 글래스고 밴드 프라이멀 스크림(Primal Scream)의 ‘Velocity Girl’이었고, B면의 1번 트랙은 에든버러 밴드 숍 어시스턴츠(Shop Assistants)의 ‘It's Up to You’였죠. 

숍 어시스턴츠 ‘It's Up to You’

이 컴필레이션 앨범은 영국을 비롯한 세계 인디 음악의 역사에 큰 전환점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사실 ‘트위(Twee, ‘감상 돋다’)’하다는 비난을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C86>이 발표된 이후 이런 ‘트위’한 아마추어리즘 계열의 음악들을 싸잡아서 ‘C86 계열’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 중심에 더 파스텔스가 있습니다.

더 파스텔스. 왼쪽부터 카트리나 미첼, 안나벨 라이트, 스테판 맥로비. 출처 더 파스텔스 밴드캠프

더 파스텔스를 듣고 ‘스코틀랜드의 벨벳 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면 정확하게 들은 겁니다. 실제로 더 파스텔스의 척추나 다름없는 스테판 맥로비(Stephen McRobbie, 보컬, 기타)가 사랑한 밴드 중 하나가 벨벳 언더그라운드였으니까요.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당시 스코틀랜드 인디 신의 한 축을 담당한 컬쳐 아이콘이었습니다. 수프 드래곤스 (The Soup Dragons)의 멤버인 션 딕슨(Sean Dickson)은 당시의 클럽을 회상하며 “남자애들은 퍼디 컷(바가지 머리)에 짙은 색이나 검은색 일자 데님에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은 전형적인 벨벳 언더그라운드 룩을 하고 있었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맥로비는 한 인터뷰에서 “우리 중 누구도 ‘트위’하지 않다”며 감상적이라는 표현에 질색을 표했지만, 염세적이면서도 따듯하고, 되는대로 쓴 것 같으면서도 절묘하게 아름다운 멜로디와 그 멜로디를 부르는 맥로비의 나른한 목소리를 듣자면 조금 감상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살짝살짝 정음을 벗어나는 그의 노래 실력은 외국어로 받은 사랑 고백처럼 진심으로 느낄 수밖에 없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하여튼 맥로비의 말과 우리가 느낀 걸 종합하면 ‘의도치 않았는데 감상적인’, ‘예쁘고 싶지 않았는데 예쁜 음악’이라고 표현하는 게 정확할 듯합니다. 사실 그게 더플코트를 입고 퍼디 컷을 하고 다녔던 글래스고의 ‘내심’ 펑크록커들, 그리고 그 신의 중심에 서 있던 더 파스텔스의 미학이기도 합니다. 엄청 무섭게 으르렁거리는 고양이가 생각나는 건 저뿐인가요?

The Pastels ‘Nothing to be done’ 

더 파스텔스의 매력을 논하면서 글래스고의 톰보이라 불렸던 안나벨 라이트(Annabel Wright)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더 파스텔스에서 베이스를 주로 담당했던 그는 이후 글래스고 신의 여성 보컬들에게 씻을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고 적어도 저는 믿고 있습니다. 원래 숍 어시스턴츠의 메인 보컬로 있던 안나벨 라이트의 특징을 가장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노래는 ‘Nothing to be Done’입니다. 맥로비의 보컬 한 소절이 끝나고 바람 소리처럼 등장하는 안나벨 라이트의 목소리를 듣자면 벨 앤 세바스찬 시절의 이소벨 캠벨(Isobel Campbell)과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의 트레이시앤 캠벨(Tracyanne Campbell)이 곧바로 떠오를 겁니다(자매 사이 아님). 물론 이런 스타일의 보컬(공기만 80%)이 그가 처음은 아니지만, 가장 혀 짧은 발음을 구사한 것만은 확실합니다. 안나벨 라이트는 <Illumination>(1997)을 발표하고 2000년에 팀을 떠난 후에도 신보 작업에 참여하는 우정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The Pastels ‘Check My Heart’ MV 

2집 때부터 함께 활동하고 맥로비와 같은 집에서 거주 중인(오랜 연인 사이) 드러머 카트리나 미첼(Katrina Mitchell) 역시 더 파스텔스의 디스코그래피를 지배하는 뮤지션입니다. 그가 더 파스텔스에 합류하고 나서야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건 공연한 사실이자 이 팀의 색채를 만드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맥로비는 <피치포크(pitchfork)>를 통해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유아적인 드러밍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지요. 드럼을 치기 시작한 지 20년이 넘었으니 당시엔 ‘미숙’이었지만 이제는 ‘절제’라고 표현해도 무방한 그의 드러밍은 더 파스텔스의 미니멀한 편곡을 지탱하는 굵은 뼈대입니다. 만약 드럼을 배우고 싶다면 더 파스텔스가 2013년에 발표한 최신작 중 ‘Check My Heart’를 카피해 봐도 좋을 듯합니다. 당장 녹음 부스에 들어가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길 테니까요.

그럼 다음 편에는 BMX 밴디츠(BMX Bandits)와 틴에이지 팬클럽으로 이어지는 파워 팝(power pop)을 소개하겠습니다.

 

Writer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서 연예, 음악, 영화, 섹스 영역을 담당하는 기자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 생일이 같은 선택 받은 팬이자, 가장 좋아하는 밴드 틴에이지 팬클럽의 한국 수행을 맡았던 성공한 덕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