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 <Balenciaga Men Summer 2017 Collection>

2017년 여름 시즌을 발표하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런웨이에 파란색 이케아 장바구니가 등장했고, 관객들은 경악했다. 비록 재생 비닐 소재가 아닌 고급 소가죽으로 제작되었고 ‘경박한’ 노란색의 로고도 손잡이에 없었지만 이 가방이 크기나, 형태, 컬러까지 이케아의 ‘FRAKTA’를 차용하고 있음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CNN등 주요 언론사는 두 제품의 다른 점이란 250만 원과 1,000원이라는 가격뿐이라며 럭셔리 브랜드의 품격을 잃어버린 발렌시아가를 근엄히 꾸짖었고, 제품이 출시되자마자 솔드아웃되는 기현상을 바라보며 장바구니도 명품 딱지가 달리면 비싸게 팔린다며 조롱했다.

사실 패션쇼란 각 브랜드가 마케팅 전쟁을 펼치는 이벤트이므로 대형 메이저 언론사까지 나서서 언급해준다면 대성공이라 할 수 있다. 신기한 지점은 따로 있다. 그 어떤 외계인 같은 옷들이 등장해도 패션쇼란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무덤덤하던 대중들이, 어째서 이케아 장바구니의 등장에는 이 정도로 반발을 하거나 혹은 열광하는 것일까?

발렌시아가의 도발 이후 이케아 가방을 활용한 다양한 커스텀 제품이 만들어지고 SNS로 공유되며 이케아 밈(meme)이 확산되었다, 이미지 출처 – 링크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선 패션계가 트렌드를 변화시켜온 오랜 전략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TV나 자동차 같이 기술 혁신으로 소비를 촉진할 수 있었던 여타 디자인 분야와 달리 패션의 혁신 전략은 순수 미술의 방법론과 유사하다. 바로 고급문화를 하위문화의 요소로 오염시키는 것이다. 앤디 워홀이 대중적 광고 이미지로, 바스키아가 그래피티로 회화라는 고급문화를 오염시키며 혁신을 추동했듯 패션계도 비슷한 방식으로 트렌드를 만들어왔다.

샤넬은 속옷이나 운동복에만 쓰였던 저지 원단을 이브닝드레스로 만들며 유행을 선도했고, 입생로랑은 최전방 병사들의 전투복들을 데이 코트로 탈바꿈 시켜 1960년대 독보적인 디자이너로 발돋움했다. 이러한 전략은 LVMH와 케어링(KERING)그룹이 럭셔리 브랜드를 본격적인 글로벌 사업으로 확대한 이후에도 잘 먹혀 들었다. 고전적인 서구 전통 복식에 모즈와 펑크 등 영국의 반항기를 섞어 버무려낸 존 갈리아노가 디올을 90년대 후반 최고의 브랜드로 성장시켰고, 더욱 파격적인 패션계의 악동 알렉산더 맥퀸은 화려하고 연극적인 런웨이 쇼의 정점을 수놓았다. 또한 고전적 테일러링에 음탕한 퇴폐미를 곁들인 톰 포드는 구찌를, 팝아트적 장난기를 섞은 마크 제이콥스는 루이뷔통을, 고루했던 트렌치코트에 영국 서브 컬쳐를 접목한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버버리를 최고 명품 브랜드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Alexander McQueen 2008 F/W>
Louis Vuitton X Murakami Takashi, ‘Mini Trunk Bag’ directed by Marc Jacobs, 이미지 출처 – 링크
<Burberry Prorsum 2011 S/S>, Stud Trench Coat, 이미지 출처 – 링크

이 같은 전략이 유효했던 이유는 고급스럽지만 새로운 것을 원하는 사람들의 모순적 욕망에 기인한다. 기계를 이용한 대량 생산품에서는 흉내 낼 수 없는 장인들의 솜씨로 빚어낸 클래식 헤리티지, 즉 고급 가죽 핸드백이나 구두, 테일러드 수트, 꾸띄르(Couture) 드레스 등의 제품들은 높은 가격과 럭셔리 브랜드의 품격을 증명하는 명분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런 과거의 유산들은 필연적으로 정체되어 있을 수밖에 없기에 젊음과 역동성을 상징하는 참신한 요소가 필요하다. 거기에 부합하는 것이 기성 체제에 반발하며 등장한 모즈, 펑크, 히피와 같은 서브 컬쳐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파괴적이고 비인습적이기에 과거와는 전혀 다른 매력적인 문화 요소들을 생산해 낼 수 있었다. 낙하 사고는 두렵지만 롤러코스터는 신이 나듯, 사회 전복은 불편하지만 혁명의 아이콘은 설레는 법이다. 서브 컬쳐는 그 본질이야 어떻든 청춘의 상징으로 포장되어 상류층의 소비를 촉진하는 훌륭한 매개체로 활용되어 왔다.

이렇듯 1900년대 초부터 2000년대까지 패션계는 장인 정신이 깃든 고급 수공예품을 반항적인 서브 컬쳐의 요소로 오염시키는 방법을 통해 유행을 만들어왔다. 그 참조가 되는 대상은 시즌에 따라 매번 달라졌지만, 디자인 방법론 자체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무리 평상복으로 입을 수 없는 기괴한 옷이라 할지라도 이 틀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패션계 변방인 동유럽에서 나고 자란 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Demna Gvasalia)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세대, 혹은 더 어린 세대에게 고급문화나 하위문화라는 것이 진짜 있었나? 그와 함께 브랜드 ‘VETEMENTS’을 이끌었던 스타일리스트 로타 볼코바는 말한다.

“새로운 세대에게 서브 컬쳐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라이더 자켓을 입고 섹스 피스톨즈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는 다해도 펑크 음악을 싫어할 수 있으며 그들이 지향했던 정치 사상에는 관심도 없다.”

밀레니엄, Z 제네레이션으로 불리는 이 새로운 세대에게 있어 수트에 넥타이를 매고 ‘브로그 없는 옥스포드’ 구두를 신는 격식에 얽매이는 건 더는 부의 상징이 아니다. 그들이 진정 선망하는 성공한 IT 벤쳐 사업가, 운동 선수, 힙합 뮤지션들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는다. 한정판 나이키 스니커즈를 100만 원 넘게 웃돈을 주고 구매하는 그들에게 럭셔리란 제품의 카테고리로 구분되지 않는다. 하위문화란 것도 마찬가지. 68혁명이나 히피처럼 세대 전체를 아우르며 기성 체제에 저항했던 뜨거운 청춘의 서사 따윈 이들에게 없다. 그저 취미나 취향에 따라 수천 개로 나누어진 집단(tribe)만이 존재할 뿐이다.

<Exactitudes>프로젝트(오른쪽)와 이에 영감을 받은 <Vetements 2017 Winter Collection>(왼쪽), 이미지 출처 - 링크

이들의 이런 세계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사진집 <Exactitudes>다. 1994년 네덜란드의 테크노 클럽에 상주하던 개버(Gabber)족들을 한데 모아 찍은 걸 시작으로 전 세계 각양각색의 스타일을 담아낸 이 프로젝트는 여타 다른 사진집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차이점이 있다. 바로 그 어떤 스타일이든 같은 레이아웃과 포즈, 구도로 찍는다는 점이다. 수트와 넥타이 차림의 사장님들(77. Elders)이라고 근엄하게 찍지 않으며 청바지, 청재킷을 입은 반항아들(138. Rebels)이라고 청춘의 상징처럼 찍지도 않는다(심지어 중년의 남자들로만 모아 찍었다). 모히칸 펑크 족이든 배불뚝이 관광객이든 손수레를 끌고 장을 보는 진주목걸이의 할머니든, 이들에겐 동등한 지평 위에 올려진 ‘위계 없는 차이’만이 존재하는 무의미한 기호들일 뿐이다.

더는 수제 공예품을 품격의 상징으로도 여기지 않고, 펑크나 히피의 반항적 문구에도 가슴이 뛰지 않는 세대에게 있어 상위문화를 하위문화로 오염시킨다는 전략이 통할 리 없다. <Exactitudes> 프로젝트를 베트멍의 2017년 겨울 컬렉션 테마로 삼을 정도로 이 새로운 세계관에 동조했던 뎀나 바잘리아는 무엇이 중요한 포인트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럭셔리 브랜드에 기대하는 것은 더는 캐시미어 수트나 카프 스킨 핸드백만이 아니다. 후드티든 운동화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단지 ‘얼마나 새로운 이야기를 참신한 방식으로 조합하고 풀어내는가?’가 문제다. ‘Too young to die’ 같은 펑크다운 문구가 반항의 메타포로 인식되기는커녕 지겹고 식상하기만 한 세대에겐 차라리 DHL 로고를 새기는 것이 더 신선하다. 영수증, 택배 송장, BIC 라이터, 공사장 형광색 안전 조끼, EXIT 사인, 한물간 데스메탈 밴드의 앨범 커버 등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이 소재가 될 수 있다. 얼마나 ‘기발하게’, ‘재밌게’, 혹은 ‘아름답게’ 조합하고 구성하는지가 관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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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디자인 철학 아래 2014년 설립된 브랜드 ‘VETEMENTS(프랑스어로 옷을 의미)’은 새로운 것을 갈구하던 젊은이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으며 가장 영향력있는 브랜드로 성장했고, 수장 뎀나 바잘리아는 럭셔리 브랜드 발렌시아가의 새로운 디렉터로 임명된다. 비교적 자유롭게 방향성을 정할 수 있는 디자이너 브랜드와는 달리 수많은 인력과 매장들이 연결된 럭셔리 하우스의 디렉팅이란 훨씬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소재 자체에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케아 백’을 가죽으로 만든 것은 이러한 분위기를 반증하는 증거다. 기존 럭셔리 브랜드의 문법을 통째로 파괴해버린 도발에 CNN까지 나서서 근엄히 꾸짖었지만 뎀나는 그 다음 시즌에 보란 듯이 더 대담한 도발로 대박을 터뜨린다. 일명 ‘아저씨 신발’이라 불리는 우악스러운 트레킹화를 기반으로 디자인된 ‘트리플 S’ 스니커즈를 대성공시킨 것. 이로써 발렌시아가는 구찌와 더불어 명실상부한 리딩 브랜드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Balenciaga Men Winter 2017 Show>에 등장한 Triple S 스니커즈. 2010년 후반 최고의 트렌드 중 하나인 ‘어글리 슈즈’ 열풍의 주역이 된다, 이미지 출처 – 링크

베트멍과 발렌시아가의 성공을 단순히 스트릿 웨어 혹은 애슬레저의 유행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2010년대를 관통하며 일어난 이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다. 스트릿 웨어같은 지엽적인 트렌드는 서서히 지나가고 있지만, 상하의 위계가 사라진 세계관으로 인한 혼돈의 카오스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종래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게 대체 무슨 패션이고 디자인이야’라는 말이 절로 나올만한 충격파가 서서히 다가오는 중이다.

 

Writer

ISOFLX 디렉터 겸 디자이너, 디자인 연구소 FLX(RESEARCH)LAB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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