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걸으면 요란한 네온사인 아래 드문드문 비틀거리는 사람이 보이고, 사납게 치솟은 빌딩 층마다 뭔가에 분주한 굽은 등이 보인다. 자본의 횡포가 적나라한 도시는 시종 매섭게 보이지만, 언제든 우회로를 찾을 수 있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잿빛 공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아도 밤만 되면 거리엔 서늘한 낭만이 자리하니까. 난 가끔 걸음을 멈추고 도시의 삶을 상상한다. 그들 각자의 내밀한 속사정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글을 쓰고 싶어 진다. 늦은 저녁 방 한구석에 앉아 정적에 휩싸인 채 뭔가를 적는다. 노트북을 펴고 문장을 이어나가다 보면 기분이 나지고 누추한 세간도 어여삐 뵌다. 수많은 작가들이 이런 키친테이블노블(Kitchen Table Novel)로 생계를 꾸렸다. 알다시피 키친테이블노블이란 자신의 식탁 위에서 긁적이는 소설을 말한다. 좀 더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일찍이 잠자리에 든 가족 몰래 차를 끓이고 식탁에 앉아 뭔가를 적으며 다른 세상을 상상한다. 그의 유일한 일상의 구원은 퇴근 후 자신만의 작은 테이블에 앉아 글을 쓰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무수한 이들이 다들 그렇게 쓰고 고치고 망설이다 지우길 반복하며 이 밤을 보내리라. 바삐 돌아가는 일상은 잠시 잊고 지금 잘살고 있는지 자문하면서 문장을 쌓아 올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늘은 늦은 밤 읽기 좋은, 더 나아가 글을 쓰게 하는 책 세 권을 소개한다.

 

일간 이슬아(2018)

일기를 쓰지 않는다. 한때 열심히 쓰던 시기도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새해가 되면 빳빳한 다이어리를 사서 만져보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그것도 두어 달 지나면 자연스레 방치했다. 일기라는 건 매일 하나씩 쓴다는 약속이다. 날마다 쓰지 않으면 의미를 상실하니 실로 터무니없다. 내가 탐구생활 쓰는 초등학생도 아니고 될 턱이 없다. 쓰고 싶다는 마음이 없는 글은 그 자체로 노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일간 이슬아>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내용을 차치하고 그 양에 경악했다. 이 정도 분량을 매일 쓴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난 질보단 양을 믿는 쪽이라 우선 원고지 15매가 훌쩍 넘어가면 감복한다. 이슬아 작가는 믿을만한 작가라고 생각했다. 도망칠 구석 없이 몰아붙이는 전사처럼 보였다. 그가 펴낸 두툼한 단행본을 만져보며 경외를 가졌다. 나의 과거, 내 기억,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이 정도로 쏟아내려면 얼마나 시간을 멈춰 세우고 문장을 떠올려야 할까. 그는 근면한 노동자처럼 쓴다.

작가 ‘올더스 헉슬리’는 66번의 반복이 진실을 만든다고 했다던데, 내 생각에 누군가의 글을 반복해서 읽으면 그 생각에 푹 빠질 수밖에 없다. 그건 맹목적인 구석이 있어서 작가의 사고체계에 나를 맞추게 된다. 내겐 이동진과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랬다. 스스로 사고할 필요가 없기에 편하기까지 하다. 때론 눈뜬 이의 장광설도 성경 한 구절처럼 ‘오 지저스’ 하며 받아들인다. 난 그걸 텍스트의 주술적 힘이라고 믿는다. 최근 며칠간 자기 전에 <이슬아 수필집>을 읽었더니 그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졌다. 아침 출근길에서 회사 앞 가로수를 볼 때나, 점심시간에 후배와 농담을 따먹을 때도 그처럼 각별한 단어를 골라내는 내가 느껴진다. 어쩐지 귀엽고 조금은 속된 그런 말이 입가에 맴돈다. 쓰고 싶은 게 있을 때 시작하는 글은 서두부터 힘이 넘친다. 연필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손을 키보드에 얹기만 해도 문장이 쏟아진다. 이슬아의 글은 삶의 느낌과 감촉을 매만지려는 각오가 키보드에 옮겨붙도록 날 몰아붙인다.

 

청춘의 문장들(2004)

수십 권의 소설을 쓴 작가 '스티븐 킹'에 의하면 글쓰기란 정신 감응이며, 문학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감응이라고 적었다. 독서를 하며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나와 저자가 잘 맞는다고 느낄 때가 있다. 문장의 생김새와 단어를 어루만지며 내가 자연스럽게 그의 공간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든다.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은 시종일관 멀리 가지 않고 내 지근거리에서 속삭이는 문장이 빼곡하다. 백지만 보면 겁부터 내는 나 같은 애송이를 위해 이런저런 말을 해준다. 어깨를 툭 치기도 하고, 등을 쓰다듬기도 하면서 다 첨엔 그런 거라고 구슬린다.

<청춘의 문장들>에서 김연수는 서문에서 “내가 사랑한 시절들, 내가 사랑한 사람들, 내 안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진 것들, 지금 내게서 빠져 있는 것들”을 이 책에 적었다고 말한다. 그가 소설가로서 지나온 시절들을 털어놓고, 앞으로 어떤 글을 써야 할지에 대해 얘기한다. 내가 이런 책도 좋아하고, 이런 음악은 끝내주더라 편하게 말을 건다. 평상에 마주 앉아 과자 나부랭이를 좀 깔고 맥주를 들이켜며 문학과 글쓰기에 대해 떠드는 거다. 어려운 거 없다며, 안개가 자욱한 바깥 풍경을 보며 문장을 잇지 못해 긍긍하는 나 같은 인간이 태반이라고. 잔이 비울 새라 한 잔 따라주니 문장이 콸콸 쏟아진다. 역시 캔보다는 따라주는 재미가 있는 병맥주를 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난 뭔가 찡해져서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짓는 허튼 문장이 무의미로 사라져도 괜찮다고. 매일 비슷한 글을 쓰는 것 같은 불안감도 그때뿐이라고. 오로지 나만을 위한 글에도 밤하늘 영롱한 빛이 있다며. 난 의심할 새도 없이 다정한 문장에 취해 연거푸 잔을 들이켠다. 김연수 작가가 문청 시절 머물렀던 정릉 꼭대기 하꼬방 경치는 내 생각과 달리 꽤 근사하다. 날씨가 추워 잠바로 목을 여몄다. 그래도 술이 좀 들어가니 취기가 돌아 살만하다. 이런 기분은 글쓰기에 제격이다.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2020)

작가 제임스 설터는 공군에서 조종사로 복무했고, 이후엔 전업 작가로 살았다. 설터는 비행 기지에서 작전에 투입되는 긴박한 삶에 만족했지만, 늘 책을 읽고 글을 쓸 시간이 부족했다. 늘 문장을 노트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굴려보며 단어를 골라냈다. 한끝 다르기 위한 다툼의 연속이었고, 이 짓을 평생 해도 질리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막연하게 흘러가는 오후가 온통 문학을 위한 시간이라면 사회에 나가서도 뭐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짐작했다. 고민 끝에 전역을 택한 설터는 허투루 쓰지 않았고, 한 철이 지나가는 순간을 여러 권에 남겼다.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은 제임스 설터가 살아온 시간이 파편처럼 담겨있다. 그가 오랜 시간에 걸쳐 기고한 산문을 읽다 보면 꽤 긴 시간 대화를 나눈 기분이 든다. 자연스레 한 남성이 긴 코트를 입고 너른 들판에서 뭔가를 적는 모습이 그려진다.

소설가 '제임스 설터'는 평생에 거쳐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이 모든 게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에요." 난 수많은 이들이 바쁜 일상에도 굳이 흰 노트에 뭔가를 적는 이유를 생각한다. 그건 어쩌면 이 세계에 오직 '개츠비'와 '조르바'의 목소리만 살아남는 건 아니라는 위안을 얻기 위해서다. 설터의 글엔 매일 아침 가방에 소설책을 한 권 챙겨 넣고 하루를 버텨나가는 한 남자의 일상이 담겨있다. 다시 어둑한 작업실로 돌아가기 위해 막 끓은 커피를 잔에 따르는 시간을 녹여낸다. 설터의 문장은 간결하고 단단해서 빈틈이 없다. 글을 쓰고자 하는 이라면 교본처럼 본받을 만한 문장이 가득하다. 설터는 시종 쓸려나가는 누군가의 생을 부여잡고 긍긍한 채 어휘를 고른다. 작가 '랠프 월도 에머슨'이 "문학의 쓸모란 우리 현재의 삶에 대한 관점을, 우리가 거기에 디디어 움직이는 버팀목을 얻을 수 있는 장을 제공하는 것"이라 했다지.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은 유효기간이 지나면 폐기될 우리의 보잘것없는 삶에 30촉 백열등을 비춘다.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