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을 생필품이라 하여도 이상하지 않은 오늘날에도 빨간색 우체통은 굳건히 존재한다. 보내는 순간 도착하는 SNS 메시지 대신, 우리는 여전히 연필로 꾹꾹 눌러쓴 편지를 부치고 느릿느릿 답장을 기다린다. 우표가 붙은 편지 봉투를 조심스레 뜯을 때면 도착하기까지의 짧지 않은 시간이 묻어나서인지, 아니면 직설적인 용건을 묻기 이전에 ‘안녕?’혹은 ‘잘 지내니?’와 같은 상냥한 인사말로 말문을 열어서인지, 유독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술렁술렁 밀려온다. 여기 영화 속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윤희에게>

살다 보면 뭐든 더는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있지 않느냐고, 오랜만에 적어 내린 편지 말문에 '쥰'(나카무라 유코)은 그리 물었다. 벌써 20년이나 지났으니 자신을 잊지는 않았을는지. 잘 지내고는 있는지. '윤희'(김희애)에게 안부를 묻는 긴 편지에는 짙은 그리움과 함께 여전히 변치 않은 애정과 관심이 가득하다. 차마 부치지 못했던 그간의 편지들과 같이 자취를 감출 뻔했던 쥰의 편지는 '마사코 고모'(키노 하나)에 의해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오타루에서 서울로, 윤희의 집으로 향한다.

그렇게 우편함에 가지런히 꽂힌 편지는 윤희의 딸, '새봄'(김소혜)에게 먼저 발견되고 몰래 내용물을 뜯어본 새봄은 대뜸 윤희에게 오타루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누구에게나 예기치 못한 편지였고 갑작스러운 여행이었다. 허나 어떻게 지내고 있냐는 쥰의 물음에 이젠 윤희가 답할 차례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쥰에게, 하고 다정히 말이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평범하지만 사랑스러운 '라라진'(라나 콘도르)에게는 옷장 속 상자에 감춰둔 편지 다섯 통만큼 자그마한 비밀이 있다. 바로 사랑에 빠질 때마다 러브레터를 쓰고 그것들을 전부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편지봉투엔 상대방의 주소까지 적혀 있지만 그저 제 짝사랑을 정리하기 위해 쓰고 밀봉해 두었을 뿐이다. 그러나 언니의 남자친구였던 이웃사촌 '조쉬'(이스라엘 브로우사드)에게 편지를 적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과거 라라진의 첫키스 상대이자 한때 짝사랑 상대였던 '피터 카빈스키'(노아 센티네오)가 갑자기 저를 찾으며 얼토당토않는 이상한 말들을 늘어놓는 것이다. 라라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익숙한 편지봉투를 발견하고 기겁한다. 분명 옷장 안 박스에 얌전히 들어있어야 하는 러브레터 중 하나였다. 게다가 저 멀리서 또 하나의 러브레터를 든 채 오고 있는 건 조쉬가 아닌가. 라라진은 상황을 무마시키고자 급한대로 피터에게 키스를 퍼부으며 절규한다. 맙소사. 러브레터들이 전부 발송되었다.

 

<레터스 투 줄리엣>

규칙적인 초시계에 맞춰 정방향을 향해 달려가던 시간도 편지 앞에선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곤 한다. 운명이 있다고 믿는가? '소피'(아만다 사이프리드)와 '클레어'(바네사 레드그레이브)는 망설임 없이 반짝이는 눈동자로 ‘YES!’를 부르짖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 베로나에 도착해 줄리엣의 발코니를 둘러보던 소피는 우연찮게 벽 틈새 숨어있던 낡은 편지를 발견한다.

50년 전, 클레어라는 여성이 보내 두었던 이 편지는 사랑하는 '로렌조'를 뒤로하고 떠나야 하기에 고통스럽다는 제 심정을 담은 연서였고, 이에 감명받은 소피는 그에게 정성 어린 답장을 보내기로 한다. 온 마음을 다하면 그 무엇도 움직일 수 있다 했던가. 며칠 지나지 않아 이번엔 소피의 답장에 감복한 클레어가 자신의 첫사랑 로렌조를 만나고자 직접 베로나로 찾아온다. 약간은, 사실은 아주 많이 언짢아 보이는 그의 손자 '찰리'(크리스토퍼 이건)와 함께 말이다.

 

<러브 레터>

가닿지 않을 편지를 보냈고, 받을 수 없는 답장이 왔다. '히로코'(나카야마 미호)의 남자친구 '이츠키'(카시와바라 타카시)가 죽고나서 3번째 기일을 맞이하는 해였다. 이츠키의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보다 알게 된 그의 옛 주소는 현재 국도가 되어 사라졌다고 했다. 하지만 잘 지내냐는 히로코의 물음에 이츠키는 감기가 걸렸지만 잘 지내고 있다는 답을 보내온다. '후지이 이츠키'(나카야마 미호). 그와 같은 동네에 살고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동명이인이라 하였다.

연고 하나 없던 둘은 ‘이츠키’라는 이름과 편지를 통해 관계를 이어 나가게 되고, 이츠키는 히로코에게 생각해보니 고등학생 시절 저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남학생이 있었다 귀띔해준다. 입학한 이래 그가 갑작스레 전학을 가게 되기 전까지 3년 내내 같은 반 동급생이었다 했다. 그 말에 히로코는 이츠키에게 그의 학창 시절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느냐 부탁하고 이츠키는 흔쾌히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Writer

감상한 영화보다 보고 싶은 영화가 더 많아져 힘든 요즘입니다. 모쪼록 보고 싶은 것들을 전부 다 볼 수 있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