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소녀백서>(Ghost World)는 테리 즈위고프 감독의 첫 장편 극영화다. 이 작품 전까지 즈위고프의 필모그래피에는 두 편의 다큐멘터리만 있었을 뿐이다.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던 이 영화는 2002년 아카데미 시상식 각색상 후보로 올랐으며, 같은 해 골든 글러브 여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에도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비록 무관으로 끝났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오늘날 컬트 클래식의 반열에 올랐다. 2017년에는 크라이테리온 컬렉션에서 블루레이로 발매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한국에 2002년 개봉한 이 영화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대니얼 클로즈의 그래픽 노블 <고스트 월드>(Ghost World)가 2007년에 정식 발간이 되기 전까지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원작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을 터였다. 이윽고 뒤늦게 원작을 접한 이들은 아마도 꽤나 충격을 받았을 거라 사료된다. ‘판타스틱’도 ‘소녀백서’도 없는 민낯의 유령 세계는 제목만큼이나 불친절하기 때문이다.

 

대니얼 클로즈, 형식과 냉소의 마법사

이미지 출처 - 링크

<고스트 월드>의 작가인 대니얼 클로즈는 ‘만화계의 아카데미’인 아이즈너상(Eiser Awards)을 5회나 받은 미국 만화계의 살아있는 전설 중 한 명이다. 주로 이름 없는 소도시를 배경으로 끊임없는 대중문화의 인용과 냉소적인 농담을 가득 담은 블랙 코미디를 쓰며 ‘세상의 모든 것’을 조롱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 조롱들은 결국 발설자인 주인공의 삶으로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통쾌함이 아닌 출구 없는 쓸쓸함을 만들어낸다. 클로즈가 쓰는 대부분의 서사는 큰 줄기 없이 파편화 되어 있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의 신문 만화인 코믹 스트립(Comic Strip)으로 연재되었던 많은 작품들의 작풍을 여럿 차용한다. 조각난 서사와 형식이 종국에 하나로 연결되며 신문의 일면처럼 완성되는 과정을 보는 것이 클로즈의 작품을 보는 맛이라 할 수 있다.

 

대니얼 클로즈의 <고스트 월드>

출처 - 민음사 세미콜론 홈페이지

클로즈의 작품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자전적 성질이 가장 많이 반영된 <고스트 월드>는 그의 1인 잡지였던 <에잇볼>(Eightball) 중 연속되는 여덟 꼭지를 묶어서 출간한 작품이다. 단행본으로 출간하며 일부 작화를 수정하고, 각 에피소드에 소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연속성이 없는 플롯, 지독한 냉소와 조롱, 연이은 대중문화의 인용 등 초기작임에도 클로즈의 특징들을 대부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다만 형식 면에서는 흑색과 청색의 2도 인쇄만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에잇볼 초기작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던 특징에서 기인한다. 일부에서는 ‘어두운 방에서 적막하게 비추는 TV의 빛’을 표현하기 위함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 출처가 확인되지 않아 덜컥 믿기는 어려운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작화의 형태가 작품의 적막한 정서를 훨씬 명징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연재 중 인쇄 실수로 흑색과 오렌지색의 2도 인쇄로 나온 에피소드를 단행본 때에 청색으로 바꾸기도 했다.

이미지 출처 <고스트 월드>(세미콜론, 2007) 직접 촬영

클로즈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에 대해 ‘나의 대행자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라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니드와 레베카가 세계-소도시에 대해 내뱉는 모든 말은 누구의 의지도 반영하지 않은 외침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그만큼 그들을 둘러싼 세계도 공허한 빈 껍데기일 뿐이다. [고스트 월드]는 이니드라는 어른의 문턱에 선 소녀가 그 사실을 깨달아가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이니드는 레베카보다 먼저 세상의 형태를 감지하며, 이는 자기혐오로, 그리고 세계에서의 탈출로 이어진다.

 

유령의 세계에 색을 입힌 <판타스틱 소녀백서>

놀라운 사실은 원작자인 대니얼 클로즈가 영화의 각본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클로즈는 처음엔 원작에 입각한 각본을 썼지만 이내 그것이 장편 영화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완전히 원작을 의식하지 않은 두 번째 각본을 완성한 뒤, 첫 번째 각본과 섞어 최종고를 완성해낸다. 이 과정에서 클로즈의 다른 작품들에서 가져온 아이디어와 감독 즈위고프의 과거사가 덧붙여졌다. 이를테면 계절 학기와 연관된 소재들은 에잇볼의 다른 꼭지인 <아트 스쿨 컨피덴셜>에 다수 차용되었다. <아트 스쿨 컨피덴셜> 역시 즈위고프/클로즈 팀에 의해 2006년에 영화화 된다.

원작과 영화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무엇보다 여덟 개의 에피소드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던 원작과 달리, 영화는 에피소드들을 직조하여 하나의 큰 서사를 만들어낸다. 물론 다른 것은 서사만이 아니다. 즈위고프의 영화는 원작과 달리 풍성한 색을 사용하고 있다. <판타스틱 소녀백서>에 나오는 많은 장소들, 이니드의 방이나 만화 가게, 조쉬가 일하는 마트의 색조 넘치는 풍경은 <고스트 월드>의 청색 세계와 비교된다. 특히 도라 버치가 분한 이니드가 매 씬 보이는 패션쇼는 영화의 모든 쇼트들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이니드의 감정을 훨씬 더 풍성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고스트 월드>에는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인 '시모어'(스티브 부세미)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다. 시모어는 원작의 장난 전화 에피소드에 등장한 남성을 기반으로 이니드가 쫓던 남자 ‘밥 스키츠’를 더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것들에 계속 천착하는 시모어는 나아가지 못한 인물의 표상이며, 이니드는 그와 관계맺음으로써 <고스트 월드>에서 보인 감지능력을 버리고 쉽게 안주하고 만다. 그리고 그만큼 이니드에게는 훨씬 더 화려한 색들이 입혀진다.

<고스트 월드>의 유령 세계는 이니드를 더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붙잡아두는 장애물이었다. 하지만 <판타스틱 소녀백서>의 유령 세계는 이니드를 앞지르고는 구태의연하게 버티고 선 불쾌한 미래에 가깝다. 원작과 달리 앞선 세계에 먼저 반응하는 것은 이니드가 아니라 레베카이다. 이니드가 시모어에 빠져있는 사이, 주변의 모든 세계가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한 탓일 것이다.

두 작품은 주동 인물의 속도감, 나아가느냐 정지하느냐에 차이를 둠으로써 전혀 다른 이야기를 펼쳐낸다. 즈위고프와 클로즈의 마법은 단색에 불과했던 만화의 인물에 색을 칠함으로써 시동되었다. 세계에 진짜 색을 입히고, 감정을 가질 수 있는 대상을 직조함으로써 인물의 정동을 역전시킨 것이다.

 

Writer

영화 이야기를 더 많이하는 사이비 만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