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브리스톨 인근, 로마시대 목욕탕 유적으로 유명한 소도시 바스(Bath) 출신 알렉스 기포드(Alex Gifford)는 펑크 밴드 The Stranglers에 고용되어 색소폰을 연주하다가 자신 만의 일렉트로닉 음악을 꿈꾸기 시작했다. 라이브 클럽 더 허브(The Hub)에 드나들며 DJ 일을 하면서, DJ 데크와 드럼 세트, 그리고 하몬드 오르간 조합의 음악을 구상했다. 드러머와 DJ로 활동하던 윌 화이트(Will White)를 소개받아 프로펠러헤즈(Propellerheads)라는 이름으로 EP 음반 <Dive!>(1996)를 냈고, 바로 5,000장을 팔아 성공 가능성을 보았다. 듀오의 이름은 그로부터 3년 후 스파이 영화에 수록되기를 상상하며 만든 곡 ‘Spybreak’가 SF 영화 <매트릭스>(1999)에 수록되면서 세계에 널리 퍼졌다.

영화 <매트릭스>의 타이틀곡으로 유명한 ‘Spybreak’

어릴 적부터 스파이 영화를 좋아했던 알렉스는 007 타이틀 송을 일렉트로닉 버전으로 리메이크하며 프로펠러헤즈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이내 007 음악감독 데이비드 아놀드(David Arnold)와 함께 작업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후속 싱글로 작업 중이던 곡 ‘History Repeating’에 셜리 베시(Shirley Bassay)의 카리스마 넘친 목소리가 어울릴 것이라 생각을 모았다. 셜리 베시는 <007 골드핑거>(1964),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1971), <007 문레이커>(1979)의 주제곡을 부르며, 007 전문 가수로 명성이 높았다. 이들의 끈질긴 요청 끝에 콜라보는 마침내 성사되었고, 그의 파워 보컬을 장착한 ‘History Repeating’은 영국 인디차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셜리 배시에게도 30여 년 만에 영국차트 톱 10에 오른 곡이 된 것이다.

Propellerheads (feat. Shirley Bassay) ‘History Repeating’(1997)

이 곡은 싱글 앨범의 표지에서부터 레트로를 표방했다. 앨범 표지는 30년 전 넷 킹 콜의 클래식 음반 <Just One of Those Things>(1957)를 그대로 패러디했고, 이스트 런던에서 촬영한 뮤직비디오 역시 1960년대 TV의 음악 프로그램 포맷을 가져 왔다. 재즈 뮤지션 로저 험프리스가 호스트를 맡은 가상 BBC 프로그램 <Jazz 1200>에서 디바의 모습으로 출연한 셜리 베시가 키보드의 알렉스 기포드와 드럼의 윌 화이트 그리고 노령의 브라스 밴드와 함께 스튜디오의 스태프 앞에서 음악 프로그램을 녹화하는 장면을 흑백 화면으로 재현한 것이다.

Nat King Cole의 음반 표지를 패러디한 싱글 <History Repeating>
‘History Repeating’ 뮤직비디오 메이킹 영상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현학적 메시지와 어울리지 않게, ‘History Repeating’은 경쾌한 댄스곡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다양한 빅비트 스타일의 댄스 음악으로 편곡되어 유럽 전역의 차트에 올랐고, 로맨스 영화와 드라마에서 자주 삽입되었다. 재규어 S-Type 자동차나 팬틴 Pro-V 샴푸 광고 음악으로도 쓰였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가수 자마라(Jamala)의 데뷔 음반에 수록되어 독특한 뮤직 비디오와 함께 인기를 누렸다. 그는 2016년 유로비전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면서 현재 유럽의 인기 가수로 활동 중이다.

자마라(Jamala)가 리바이벌한 ‘History Repeating’ 뮤직비디오

하몬드 오르간과 드럼을 전면에 내세운 독특한 빅비트 일렉트로닉 음악으로 혜성과 같이 등장한 프로펠러헤즈는 데뷔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98년 여름, 윌 화이트가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는 공식 발표와 함께 모든 음악 활동을 중단했다. 자신들의 음악적 특징을 드러내는 제목으로 단 한 장의 정규 앨범 <Deckanddrumsandrockandroll>(1998)만을 남긴 채 긴 휴식에 들어갔다. 알렉스 기포드만이 클럽 DJ로 활동하며 간간이 음악 페스티벌에 출연하면서 가장 짧게 공식 활동을 마감한 일렉트로닉 듀오가 되었다.

프로펠러헤즈의 사이에서 포즈를 취한 셜리 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