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주위에 널린 책을 펼친다. 눈꺼풀이 무거워 가벼운 책을 고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은 내가 즐겨 집는 주전부리다. 모로 누워 한 발을 베개에 올리고 술술 넘겨본다. 별 시답잖은 내용이 가득하지만, 어깨에 힘을 뺀 문장이 정갈하다. 그는 세상사 메이는 법 없이 느슨한 얘기를 한다. 누군가 내게 전작주의(全作主義)에 관해 묻는다면,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즉시 떠올릴 것이다. <상실의 시대>를 처음 읽었던 스무 살 무렵부터 난 여전히 그의 곁을 맴돌고 있다. 처음 소설에 재미를 붙일 무렵 서늘한 방 한구석에서 그의 소설들을 읽었다. 소설을 웬만큼 읽자 알록달록한 제목이 붙은 에세이가 눈에 들어왔다. 작품에 대한 호감이 인간 하루키로 번져나갔다. 그는 이제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도 인스타그램에 들어가면 그의 문장을 옮긴 무수한 피드를 읽어볼 수 있다. 독자는 하루키의 지적인 사생활을 통해 일상에 사사로운 질감을 섭취한다. 이번 글은 그의 걸작 에세이 두 권을 통해 인간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알아보자.

 

<직업으로서의 소설가>(2015)

하루키는 새벽에 일어나 조깅을 한다. 오전엔 네 시간가량 글을 쓰고, 식사는 생선이나 채소를 즐긴다. 그는 그날 수개월을 쏟은 소설을 탈고해도 노트북을 덮지 않는다. 그에겐 정량의 글자를 새겨 넣는 시간이 중요하다. 이른 오후엔 독서는 하고, 밤이면 늘 앉던 소파에서 재즈 스탠다드를 듣는다. '존 콜트레인' 보다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격렬한 연주를 선호하고, 비밥보다는 깔끔하고 서정적인 웨스트코스트 재즈를 턴테이블에 올린다. 술은 위스키와 맥주를 좋아하고, 소파 옆에선 고양이 씨가 목을 긁으며 하품을 한다. 하루키는 교토 외곽에 살며 도심의 개츠비들과는 거리를 둔다.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부자지만, 저녁 시간은 언제나 텅 비어있다. 그가 구축한 리듬은 매일매일 같은 궤도에 머문다. 시계를 보니 저녁 9시다. 이 밤이 저물어갈 즈음 놀랍게도 그는 벌써 잠자리에 든다.

난 하루키에게서 일종의 수도승과 같은 정절을 본다. 그가 구축한 일상은 흘리지 않고 사는 자의 위엄이 있다. 세상을 향해선 말을 아끼고, 까치발을 든 채 세속과 거리를 둔다.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세상과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하루키 자신의 문학과 취향에 관해 적은 책이다. 잘못하면 자기 자랑으로 치우치기 딱 좋은, 자의식이 빽빽한 글이지만 하루키는 제 취향을 너끈히 설명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 사사로운 일에 끝없이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작법은 이제 클래식으로 자리 잡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샐러리맨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산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책 제목처럼 하루키에게 작가라는 직업은 그저 출근하고 퇴근하는 존재 양식이다. 그는 글쓰기에 있어서 어떤 과장이나 이상화도 없다. 그의 규칙적인 삶은 온 세상이 노벨상 후보로 치켜세워도, 책 출간도 전에 수백만 부 이상 팔아치워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세상과 담쌓고 만든 이야기는 대체로 어떤 것일까. 난 한 마디로 그의 글을 ‘회한’이라고 정의한다. 하루키 소설 속 화자는 그의 또 다른 자아에 가깝다. 마치 도플갱어처럼 같은 얼굴을 하지만, 정작 삶에선 마주칠 리 없는 평행우주를 사는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상상할 수 있지만,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지향이다. 그는 자신과 다른 세계에 사는 한 남자를 떠올리며 내가 걸을 수 있었지만 걷지 못했던 삶을 소설에 쓴다. 나는 하루키가 그려낸 무수한 가능성의 삶을 경외한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2009)

며칠 전부터 등에 담이 생겨 통증이 가시질 않는다. 운동을 마쳤을 땐 미세한 삐걱거림에 불과했던 욱신거림이 이젠 내 의식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해서 운동을 거르니 집중력마저 흐트러진다. 난데없는 무기력과 우울은 등허리 어디쯤 들러붙어 요지부동이다. 막 들고나온 따끈따끈한 신작 소설에도 좀처럼 손이 안 가고, 목전에 다다른 일만 한시바삐 처리하기 바쁘다. 마치 시시포스가 받은 형벌처럼 큰 돌덩이를 등에 지고 오르내리는 기분이다. 줄줄 새는 잡념은 타르처럼 생각의 점이지대를 무너뜨리고, 식욕만 들끓어 치킨을 당의정 삼아 버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매일 새벽마다 수 킬로미터를 달리는 이유에 관해 이렇게 답한다. “때때로 매일 달리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렇게까지 해서 오래 살고 싶을까’하고 비웃듯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오래 살고 싶어서 달리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설령 오래 살지 않아도 좋으니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은 온전한 인생을 보내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달리고 있는 사람이 수적으로 훨씬 많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발을 땅에 내딛는 시간은 내 육체를 현현하게 느끼게끔 한다. 규칙적인 운동은 일상을 고르게 다듬는다. 하루키는 달리기가 단순히 운동 이상의 의식과 같은 행위라고 강조한다. 발을 내디디는 순간 땅과 직교하며 뻗어 나갈 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생동감을 느낀다. 그는 루틴을 지켜나가며 육체의 단련을 창작의 원천으로 치환한다. 흐트러짐 없이 한 발 한 발 차곡차곡 문장을 쌓아간다.

난 대체로 운전을 해서 출근한다. 꽉 막힌 여의도를 통과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시동을 건다. 출근길은 마음이 약한 시간이라 그런지 차 안에서 듣는 라디오가 달콤하다. 아침부터 지하철과 버스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출근하면, 일과가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버린다. 고요한 차 안에서 커피를 마시며 좋아하는 음악을 흥얼거리는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다. 하지만 구원이 없는 차로에 갇히면 금세 운전대를 잡은 걸 후회한다. 골목이 비좁아 주차가 번거롭다 보니 잠시도 방심할 수 없다. 운전대를 한 번 잡으면 사냥개처럼 잔뜩 곤두선 채 앞만 봐야 한다. 조금 방심할라치면 먹잇감이 불쑥 튀어나오고, 난 순수한 분노를 뽐내며 욕지거리한다. 그래서 요즘엔 출근길의 혼돈을 비껴가려고 걸어서 출근한다. 꽤 긴 시간이 걸려도 서두르지 않고 걷고 또 걷는다. 도시는 걸을 때 살만한 장소로 탈바꿈하니까. 요즘처럼 선선한 날씨에 이어폰을 귀에 꽂고 꽉 막힌 차로를 굽어보자. 걸을 때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게 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하루키는 이런 문장을 적는다. “달리는 것에는 몇 가지 이점이 있다. 우선 첫째로 동료나 상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특별한 도구나 장비도 필요 없다. 특별한 장소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달리기에 적합한 운동화가 있고, 그럭저럭 도로가 있으면 마음 내킬 때 달리고 싶은 만큼 달릴 수 있다.” 걷기와 달리기는 그런 의미에서 별다른 수고 없이 도시에서 오롯한 기분을 얻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행위다. 거치적거리고 부대끼는 것들을 끊어내고 도시의 생김새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집중하며 단독자의 시간을 즐긴다. 이런 태도는 하루키가 지닌 달콤한 고독을 향한 지향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하루키는 평생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만 써왔다. 군중과 몇 발자국 떨어진 외로운 남자.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엔 관계를 떨쳐낸 인간 하루키가 있다. 그는 소설에 다채로운 세계를 그렸지만, 어김없이 작은 체구로 어딘가를 향해 가는 남자에게 펜을 쥐여준다. 마치 아웃복싱을 하는 무하마드 알리처럼 날렵한 문장이 돋보인다. 남자가 달리며 바라보는 풍경은 하루키의 문체처럼 가볍고 청량하다. 하루키를 보면 사진가 '척 클로스'의 말이 생각난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난 그저 일하러 갈 뿐이다.” 하루키는 기상천외한 섹스신만 빼면 모든 게 평균에 가까운 남자의 여정을 적는다. 거기엔 별다를 게 없지만, 쉼 없이 다단해서 결코 지루하지 않다.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