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명의 쿼텟 멤버(좌부터 치코 해밀턴, 쳇 베이커, 제리 멀리건, 밥 휘트록)

로스앤젤레스 번화가의 윌셔(Wilshire)가에 있던 재즈 클럽 '더 헤이그'(The Haig). 지금은 사라졌지만, 1950년대에는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산실이었다. 원래 단독 주택이었던 이곳은 집주인의 개조로 아담하고 독특한 구조의 재즈 클럽으로 탈바꿈했다. 당시 인기 재즈 피아니스트 에롤 가너, 트럼페터 쇼티 로저스가 정기적으로 연주하며 로스앤젤레스를 대표하는 재즈 클럽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던 1952년 1월, 뉴욕에서 활동하던 바리톤 색소포니스트 제리 멀리건(Gerry Mulligan)이 아내와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건너와 낮에는 스탄 켄튼 오케스트라의 작곡가로 일하면서 밤에는 이곳에 드나들었다. 그는 매주 월요일 밤에 열리던 잼 세션에 합류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들의 일원이 되었다.

1950년대 로스앤젤레스의 재즈 클럽 <The Haig> 전경. '제리 멀리건 쿼텟'을 내세운 간판이 보인다

에롤 가너가 클럽 출연을 그만두자 이곳에서 좁은 무대를 점유하고 있던 그랜드 피아노를 치웠다. 그즈음 제리 멀리건이 고정 출연하기 위해 자신의 생애 첫 콤보를 조직했다. 일일이 재즈 뮤지션들을 오디션하던 중 멋진 용모의 오클라호마 출신 트럼펫 연주자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가 후일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스타덤에 오른 쳇 베이커(Chet Baker)였다. 그를 포함해 드러머 치코 해밀턴(Chico Hamilton)과 베이시스트 밥 휘트록(Bob Whitlock)이 쿼텟을 구성했는데, 그 당시에 피아노 없는 쿼텟 편성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제리 멀리건 쿼텟(Gerry Mulligan Quartet)은 피아노에서 벗어나 관악기의 자유로운 즉흥 연주를 펼치면서 금방 주목을 받았다. 클래식을 전공한 제리 멀리건과 감각적인 연주의 쳇 베이커의 하모니는 콤보 인기의 중심이었다.

제리 멀리건 쿼텟의 높은 인기를 바탕으로 싱글로 발표한 'Motel'(1952)

제리 멀리건 쿼텟의 인기가 최고조를 달릴 무렵인 1953년 중반, 리더였던 제리 멀리건이 마약 소지죄로 갑자기 연행되는 바람에 팀의 존속 기간은 단 11개월에 그쳤다. 다행히 재즈 클럽의 홍보를 맡았던 리처드 보크(Richard Bock)가 쿼텟의 연주 실황을 여러 차례 녹음할 수 있었다. 그는 이를 출반하기 위해 투자자를 끌어들여 패시픽 재즈 레코즈(Pacific Jazz Records)를 설립했고, 1952년에서 1953년 사이에 녹음된 분량을 모아 이를 <Gerry Mulligan Quartet with Chet Baker>라는 타이틀의 앨범으로 발매했다. '피아노리스 쿼텟'(Pianoless Quartet)으로서 재즈 역사에 남은 명연주의 탄생이었다.

<Gerry Mulligan Quartet with Chet Baker>에 수록한 'Bernie’s Tune'

제리 멀리건은 수감된 지 6개월 만에 재즈 신으로 돌아와 다시 쳇 베이커를 고용하고 싶었지만, 그는 이미 스타덤에 오른 후였고 협업 제안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두 사람은 정기적으로 함께 연주하지는 않았지만,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대표 주자로 틈틈이 다시 모였다. 1955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함께 무대에 섰고, 1957년에는 리차드 보크의 주선으로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만나 앨범 <Reunion with Chet Baker>을 내기도 했다. 1974년에는 카네기홀에 동시 출연해 실황 앨범 <Carnegie Hall Concert>를 남겼다.

Gerry Mulligan & Chet Baker ‘My Funny Valentine’(1974, Carnegie Hall Concert)

하지만 마약의 굴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하락세에 빠진 쳇 베이커는 유럽으로 도망치듯이 건너가 1978년부터 그곳에 정착했고, 그로부터 10년 후 암스테르담에서 불의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날 기회는 없었다. 제리 멀리건은 짧게 끝난 쿼텟 시절에 대해 회고하면서 “그와 같은 경험은 그 전이나 그 후에도 해본 적이 없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피아노 없는 쿼텟'(Pianoless Quartet)은 11개월 만에 끝난 제리 멀리건 쿼텟의 동의어로 회자되었고, 웨스트 코스트 재즈 역사의 중요한 장면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