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여타 예술과 다른 점은 그것이 '협업 예술'이란 점이다. 사공 많은 이 배가 어디로 향할지 선장인 감독조차 장담할 수가 없다. 프랑스 영화감독 클로드 소테는 카메라가 가까이 오기만 하면 굳어버리던 어느 배우에게서 최적의 연기를 끌어내기 위해 도중에 촬영 콘셉트를 전면 수정했다. 홍콩영화의 한 시대를 쥐락펴락하던 왕가위도 스탭들의 질문이 빗발치는 영화 현장에서 심리적 시간을 벌기 위해 선글라스를 쓰기 시작했고, 알려진대 로 선글라스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이토록 버거운 감독 자리에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예로부터 친구와 동업은 금물이라고들 했다. 공동 체제를 유지해 온 감독들이 대개 형제이거나, 자매이거나, 부부였던 건 그래서일까.

마이클 파웰 & 에머릭 프레스버거

이들처럼 피를 나눈 가족은 아니었음에도 협력의 순기능을 보여주며 영국 표현주의 사조에 유의미한 저작을 남긴 듀오 감독이 있었다. 마이클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 박찬욱 감독이 이들의 팬임을 공공연히 밝히기도 했거니와, 이들이 영화 감독을 꿈꾸던 어린 시절의 마틴 스콜세지에게 끼친 영향도 적지 않다. 1940년대에서 195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파웰과 프레스버거' 콤비로 불리며 50여 편의 공동 작업을 이뤄냈다. 1939년 마이클 파웰이 연출한 영화 <어둠의 스파이>에 에머릭 프레스버거가 각본가로 참여하면서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만났다.

'더 아쳐스' 제작사 로고

파웰은 "그는 말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것을 다 간파했다. 인생에서 이런 파트너를 만난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라며 프레스버거와의 만남을 회고했다. 이들은 곧 과녁에 화살이 날아와 꽂히는 시그니처 영상을 가진 제작사 '더 아쳐스(The Archers)'를 꾸리고 본격적인 공동 작업 체제를 구축해갔다. 엄밀히 말하면 작업 방식은 프레스버거가 쓴 시나리오를 함께 보완하고, 현장에서 프레스버거가 파웰의 디렉팅을 보완하는 식이었다. 예술을 향한 또렷한 자의식을 발판삼아 만들어진 더 아쳐스의 영화들은 주제로나 미학적으로나 풍성한 시도를 겁내지 않았다. <검은 수선화>, <분홍신>, <호프만 이야기> 등의 대표작에서 욕망과 집착, 광기를 재료로 거침없이 그려낸 이들의 회화적 감각을 만끽할 수 있다. 1957년 실적 부진으로 더 아쳐스는 문을 닫게 됐지만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각자 영화를 만들면서 노년까지 우정을 이어갔다. 글만으론 어디까지나 부족한 설명, 이들의 대표작을 직접 살펴보자.

 

<천국으로 가는 계단>

천국의 계단이 실존한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까. 독창적인 장면이 한둘이 아닌 이 영화에서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형상화한 장면은 가히 독보적이다. 사고로 추락한 우주비행사가 저승사자의 실수로 깨어나고, 공교롭게도 사고 직전 교신한 통신원과 사랑에 빠진 비행사는 죽음의 운명을 거스르길 원한다. 흑백과 컬러로 대비된 천상계와 지상계의 유쾌한 묘사에 눈과 귀가 즐거우나, 원래는 영미관계의 회복을 위한 선전 용도에서 출발했다.

 

<검은 수선화>

호러와 로맨스를 결합한 고딕 호러. 히말라야 꼭대기에 고립된 어느 마을에 원장으로 부임한 수녀가 교육과 기도의 소임을 다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성자보다는 야인인 행정관 '딘'과 시시때때로 대립하고, 그에게서 세속적 출구를 엿본 '루스' 자매의 욕망에 불이 붙기 시작한다. 초기 컬러영화의 유려한 색채적 야심이 돋보이는 고지대 풍경이 아름답게 펼쳐지는데, 일품은 종탑 아래서 벌어지는 클라이맥스다.

 

<분홍신>

파웰과 프레스버거의 마스터피스. 일류 명성의 작곡가 '레먼토프'가 이끄는 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나가 결혼을 발표하자, 개인의 행복과 성공은 양립할 수 없다고 믿는 레먼토프는 그를 해고한다. 차기 수석 발레리나로 발탁된 '페이지'가 곧장 유명세를 얻고 레먼토프와 페이지는 예술적 열망으로 의기투합해 성공적 무대를 이어나간다. 영원히 멈추지 않는 춤을 선물한 발레 슈즈의 이야기 <분홍신> 공연으로 커리어의 정점을 찍지만, 페이지에게도 사랑이 찾아오면서 레먼토프와 이들 사이에 팽팽한 구도가 형성된다. 17분간 펼쳐지는 압도적인 발레 시퀀스는 기록할만한 명장면이다.

 

<저주받은 카메라>

마이클 파웰이 단독으로 연출한 <저주받은 카메라>는 그야말로 저주받은 걸작이다. 영국 관객들에게 사랑받던 감독의 결과물이라고는 믿기 힘든 소재와 카메라의 대담성 때문에 평단은 분노해버렸다. 살인마의 범죄 행위를 관객에게 체험시키는 듯한 시점 쇼트에 충격을 받은 것. 비록 이 영화로 파웰의 명성이 내리막을 걷게 됐지만 훗날 카메라의 폭력성에 대한 경고로서 재평가했다. 현재는 히치콕의 <싸이코>나 <이창>과 견줄만한 작품으로 거론되고 있다.

 

Writer

예측 불가능하고 아이러니한 세상을 닮은 영화를 사랑한다. 우연이 이끄는 대로 지금에 도착한 필자가 납득하는 유일한 진리는 '영영 모를 삶'이라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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