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드라마 사상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로 <소프라노스>(1997~2007)의 '토니 소프라노'와 <브레이킹 배드>(2008~2013)의 '월터 화이트'가 자주 비교 대상에 오른다. 토니 소프라노가 의외로 소심한 내면을 숨긴 지역 마피아 보스를 현실적으로 그렸다면, 월터 화이트는 평범한 가장이 드라마틱하게 악당으로 진화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매력적인 캐릭터 월터 화이트의 탄생 배경을 알아보았다.

 

<엑스 파일>의 작가 빈스 길리건

'멀더'와 '스컬리' 요원 콤비가 인기를 끌었던 1990년대 드라마 <엑스 파일>이 2001년 아홉 번째 시즌을 끝으로 막을 내리자 작가와 프로듀서로 일했던 빈스 길리건(Vince Gilligan)은 실직 상태가 길어질 것을 걱정하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레저 차량을 이용해 크리스탈 메스(Crystal Meth, 마약의 일종)를 제조하다 적발된 한 사내의 신문기사를 전해 들었고, 이에 착안하여 동료 작가 토마스 슈나우즈(Thomas Schnauz)와 함께 스토리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통상적인 드라마의 경우 주인공의 정체성을 그대로 둔 채 다음 시즌으로 계속 이어가게 되나, 그는 이 상투적인 클리셰를 바꾸고 싶었다. 드라마는 길지 않더라도, 선에서 악으로 진화하고 이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

코난 쇼에서 월터 화이트 캐릭터의 탄생 과정을 설명하는 빈스 길리건

 

선과 악이 교차하는 캐릭터 '월터 화이트'

빈스 길리건이 새로 구상한 캐릭터 '월터 화이트'는 연봉 4만 5천 달러가 채 안되는 평범한 화학 교사로 50년을 살다가, 단기간에 천문학적인 현금을 벌어들이는 마약왕으로 변모한다. 드라마 <소프라노스>에 등장하는 '토니 소프라노'와는 캐릭터 성격상 반대편에 있다. 오십 번째 생일을 맞은 후 얼마 안 돼 폐암 3기 선고를 받고 나서야, 가족을 위해서라는 명분 하에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악의 본능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월터 화이트라는 이름은 앨라배마(Alabama)주에서 실제 메탐페타민을 제조하다가 체포된 실존 인물 이름을 그대로 쓴 것으로 보인다. 건설 현장의 목수였던 그는 10년 동안 메탐페타민을 제조 유통하는 이중 생활을 하다가 발각되었으며 보호 관찰 하에 다시 체포되어 200만 달러의 보석금을 선고받은 바 있다.

실존 월터 화이트를 취재한 영상 <The Real Walter White>

 

브라이언 크랜스톤의 유별난 캐릭터 연구

빈스 길리건은 <엑스 파일>의 한 에피소드에 출연했던 배우 브라이언 크랜스톤(Bryan Cranston)을 월터 화이트 역에 캐스팅했다. 그가 과거에 코미디언으로 출연한 경력으로 인해 제작사의 반대 의견을 무릅써야 했다. 하지만 막상 캐스팅하고 보니, 월터 화이트의 페르소나 형성에 크랜스톤의 기여도가 매우 컸다. 그는 캐릭터의 과거사를 직접 문서로 작성하여 작가들과 공유했고, 그의 의상이나 분장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자신의 실제 아버지로부터 일부 영감을 받아 마치 세상의 고민을 혼자 떠안고 사는 것처럼 구부정하게 걷는 모습이나 말투를 만들어냈고,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브라운색 점퍼를 구해 입기도 했다. 드라마 속에서의 유명한 대사처럼, 그는 위험에 빠진 소심남이 아니라 그 자신을 위험한 인물로 진화하게 한다.

월터 화이트의 진화 과정을 그린 팬메이드 편집영상

 

하이젠버그를 꿈꾸는 월터 화이트들

드라마 인기에 힘입은 덕분인지 수많은 화학 전문가들이 월터 화이트를 모방하여 실험실이나 지하창고, 혹은 임대한 레저차량에서 메탐페타민 같은 합성마약을 제조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브레이킹 배드>가 끝날 무렵인 2012년, 43세의 텍사스 소재 중학교의 화학교사 윌리엄 던컨이 주차장에서 합성 마약을 제조하다가 체포되었다. 2017년에는 뉴멕시코 엘파소 소재 고등학교 화학교사 존 고스(John Gose)가 경찰의 차량 검문에서 메탐페타민 1파운드를 제조할 수 있는 재료를 싣고 있다가 체포됐다. 그는 여러 가지로 월터 화이트와 비슷한 나이와 경력으로 인해 기자들의 열띤 취재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아칸소주 헨더슨 주립대의 화학과 교수 두 명이 실험실에서 필로폰을 제조했다는 혐의로 DEA(마약단속국)의 조사받기도 했다.

자선 이벤트 홍보 영상에 출연한 <브레이킹 배드> 주연 배우

<브레이킹 배드>의 촬영 장소인 뉴멕시코주 앨버커키(Albuquerque)에는 지금도 많은 월터 화이트 팬들이 몰려들어 월터 화이트의 집이나 그가 돈세탁을 위해 급하게 인수한 세차장을 둘러보며 월터 화이트의 메탐페타민 "블루 스카이"를 모방한 파란색의 간식을 사 먹는다. 이들 중에는 드라마에 영감을 받아 하이젠버그를 꿈꾸는 미래의 월터 화이트가 없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