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1947)는 역병이 창궐한 알제리 도시 오랑을 그린다. 소설을 읽다 보면 세계대전이 막 끝난 후라는 시대 배경은 금세 잊히고, 지금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점에 놀라게 된다. 어느 날부터 쥐가 들끓고 영문도 모른 채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거리 인파는 뉴스를 보며 걱정하면서도 별수 없이 일과를 꾸려나간다. 다수의 사망 소식이 들려와도 짐짓 표정이 굳을 뿐 덤덤한 얼굴로 맡은 일에 매진한다. 이성을 신봉하는 문명 도시는 쉽사리 절망을 상상할 수 없다. 극심한 재난은 겪어보지 않았기에 먼 얘기다. 어느 순간 불현듯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만, 손써볼 도리 없이 혼돈에 빠진다.

지금 이 시각 세계는 어떤 모습인가. 원인 모를 바이러스가 개개인을 비스름하게 무화시킨다. 유서 깊고 휘황한 도시마저 간신히 체면치레하기 바쁘다. 수인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어 텅 빈 회색빛 도시 정경이 무참하다. 흰 마스크를 쓰고 고개를 떨군 채 타인을 경계하는 군중은 카뮈의 오랑을 다시금 상기한다. 그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오늘은 무차별적인 집단 감염의 공포를 다룬 두 작품을 통해 우리 모습을 반추해본다.

 

<다크 워터스>

며칠 전 토드 헤인즈 감독의 신작 <다크 워터스>를 관람했다. 개봉 일에 맞춰 관악구의 한 영화관을 찾았다. 전염병의 여파로 객석은 듬성듬성했다. 영화는 인체에 치명적인 화학물질을 여과 없이 퍼뜨린 거대 기업을 소재로 한다. 꽤 시의성 있는 소재였음에도 관심은 기대 이하였다. 집단감염의 치명적인 여파에 경각심을 갖게 하려는 영화 의도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영화는 '헐크'로 유명한 마크 러팔로가 주연이다. 그는 세계 최대 화학 그룹인 듀폰을 상대로 이십 년 넘게 법정 투쟁을 이어가는 변호사 롭 빌럿 역을 맡았다. 재밌는 사실은 마크 러팔로가 과거에도 듀폰 가와 인연을 맺은 적이 있다는 점이다. 그는 영화 <폭스캐처>에서 듀폰사 4대손이자 미국 레슬링협회 후원자였던 존 E. 듀폰의 총에 머리를 관통당한 바 있다. 방대한 사유지를 소유하고 저택에서 고답적인 생활을 하는 거대 기업가는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 걸까. 그들에게 인류란 그저 수치적인 실적과 수직적인 계층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다크 워터스>는 보편과 동떨어진 거대 기업 문화의 야만적인 면모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기업 법무 변호사 '롭'은 어느 날 회의 중에 회사로 찾아온 고향마을 농부의 제보를 받는다. 농부의 주장에 따르면 듀폰사가 고향마을에 대량 독성물질을 허가 없이 방류 중이라고 한다. 처음에 롭은 농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으나, 실제 마을을 찾아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 후에 심각성을 깨닫는다. 롭은 조사를 진행하며 농장에 방류된 물질이 PFOA라는 독성 폐기물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심지어 우리가 사용하는 생활용품 곳곳에 이 물질이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이미 듀폰사 제품이 전 세계 시장에 수출된 상태라 손써볼 도리가 없는 상태였다. 영화는 롭이 20년 넘게 듀폰사와 벌이는 소송전을 좇는다.

이 사건은 전 세계 언론에서 다룬 바 있지만, 대중이 쉽게 이해하기엔 맥락이 지나치게 복잡하다. 게다가 영화가 내내 스펙터클 없이 오직 서류로 고뇌하는 게 전부라 보는 이마저 지치게 만든다. 그건 마치 세계를 위협하는 치명적인 악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부연과 같다. 그래서 영화는 정보를 축약하고 사건의 맥을 짚는 데 집중한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지난 작품이 의미를 건져내는 스토리텔링과 거리를 뒀다면, <다크 워터스>는 선명한 연출 시사점을 가지고 사실에 육박한다. 절체절명의 사건인 만큼 스타일을 최대한 죽이고 시종일관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태를 직시한다. 마치 봉준호의 영화 <괴물>에서 한강에 독극물을 방류하는 장면처럼, <다크 워터스>는 흐르는 물의 이미지로 악성 독극물이 우리 인체로 스며드는 과정을 시각화한다.

듀폰이라는 거대 기업은 국내 모기업과 이름을 바꿔 써도 별반 다르지 않은 무형의 산물이다. 우리는 늘 기업이 생산한 제품을 사용하지만, 정작 그 실체는 번쩍번쩍한 광고 뒤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초대형 로펌의 지원을 받는 대기업은 법 테두리 밖에 기생하고, 그 과정에서 독성 물질은 쉼 없이 뻗어 나간다. 우리는 변호사 롭의 선의를 알지만, 그가 어찌할 수 없다는 점도 인정하며 영화를 본다. 비이성적 행동을 일삼는 불특정 다수는 여전하고, 악은 매끈한 형태로 우리 곁에 기생하고 있다. 무력감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

 

<눈먼 자들의 도시>

어느 화창한 날 오후, 한 운전자가 이유 없이 눈이 먼다. 도시는 쉽사리 마비되고 그와 접촉한 사람들이 우후죽순 같은 증세를 보인다. 무차별한 감염과 패닉. 정부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인간들을 수용소에 가두기 시작한다. 소설과 영화로 만들어진 <눈먼 자들의 도시>는 요즘 시국에 걸맞은 이야기다. 차이라면 <눈먼 자들의 도시>는 사람들이 눈이 머는 이유에 대해 일언반구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집단 감염의 공포를 손에 잡힐 듯 서술하지만, 맥락이 없다는 점에서 초자연적이다.

눈이 먼 사람들은 바이러스로 앓는 환자보다 맹렬하다. 그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약탈을 일삼고, 욕정을 참지 못해 폭력에 휘둘린다. 이 작품을 일종의 사회학 실험실로 꾸린 작가는 눈먼 개체의 행동을 유심히 살핀다. 눈 하나 멀었다고 이성까지 잃은 인간은 마치 인터넷 댓글 난의 흉포한 무리와 다를 게 없다. 작가가 그 잔인함에 편승해 눈을 뜬 인간들의 통념과 허위를 폭로하고자 한다는 걸 눈치채기는 어렵지 않다. 너절한 인간의 밑바닥은 도망칠 구석 없이 노골적으로 그려져 피로를 불러일으킨다. 특히 수용소에 대한 묘사는 절망이 엄습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생존을 위해 온갖 오물과 갈등을 견뎌야 했던 나치 수용소를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다.

인류가 지닌 당위가 엎질러지면 어떤 모습일까. 이는 존엄이라는 게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선 내팽개쳐지는 건 아닐까 하는 존재의 고민과 맥이 닿아있다. 마치 벌레가 된 프란츠 카프카의 '그레고르 잠자'처럼 인류가 구축한 문화와 지성도 별 힘도 못 쓰고 불안에 휘둘린다. <눈먼 자들의 도시>의 집단감염이 지닌 두려움은 바이러스 그 자체가 아닌 오히려 그 영향을 끼친 인간 존재의 미천함을 발현하는 촉매로 기능한다. 한편 생존을 위해 기꺼이 모멸을 감수하는 모습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우리는 때론 이렇게 살 바에는 죽는 게 낫다고 쉽게 말하지만, 정작 목숨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잊고 산다. 영화는 살아가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인간 군상을 통해 인간다움이라는 건 생존 그 자체에 있다고 말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눈이 멀지 않은 단 한 사람의 등장으로 우리는 숨통을 틘다. 독자에게 관찰 시점을 선사하는 그는 구원과 같다. 그는 때때로 작가 입장에 서서 관찰 기록을 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귀하고 영적인, 더 높은 목소리로 세상을 굽어본다. 이는 비감염자가 지닌 권력, 감염자를 배척하고 밀어내는 힘의 원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질병으로 인해 개인성이 파괴된 약자들을 배척하는 국가 정책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권총의 상징도 흥미롭다. 수용소에 떨어진 한 자루의 총은 대중을 장악하고, 속된 인간들을 휘두른다. 종교의 위치에 선 눈 뜬 자와 총 한 자루에 고개를 숙이고 아첨을 떠는 인간들을 통해 권력의 작동방식은 조지 오웰이 그려낸 디스토피아와 다르지 않게 보인다. 이런 노골적인 도식은 인간 존재의 한계를 드러내는데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시각적 인지 작용이 삶에 끼치는 영향에 관한 작품이기도 하다. 캐나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의 저서 <자아 표현과 인상 관리>는 인간 행동의 겉과 속을 엿보는 책이다. 욕구를 다스리는 이성과 별도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가면 쓴 얼굴을 다룬다. 인간은 스스로 드라마투르기를 통해 입체성을 부여하고, 안팎을 구분한다. 어빙 고프먼은 말한다. “물론 이 세상이 모두 무대인 것은 아니지만, 세상이 무대가 아닌 중요한 측면들은 찾기 힘들다.” 이러한 드라마투르기는 자기 검열을 통해 이뤄지고 궁극적으로는 이상적인 나를 실현한다. 우리는 근사한 레스토랑에 담긴 고기와 도살장의 신음이 하나의 선으로 이뤄짐을 알지만, 그걸 통제할 수 없을 때 삶의 의미도 무너진다는 점도 잘 안다. 눈먼 자들의 수용소는 가면을 벗긴, 인류의 지성이 빗겨 난 카오스를 향한 두려움과 같다.

이 작품의 원작자 주제 사라마구는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2010년 타계할 때까지 수많은 작품을 남겼고, 대표적인 무신론자이기도 하다. 어느 라디오 인터뷰에서 죽어서 신의 분노를 사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답한다. "신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으면 신도 따라 죽게 되는 것이지요." 주제 사라마구는 첨단 사회에서 어떻게 종교를 믿을 수 있는지 늘 공격적으로 의구심을 제기하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카인>에서 구약성경의 일부를 재해석하여 구약성경 속 예수의 논리를 비판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신이 사라져 버린 도시를 묘사하듯 그의 작품세계는 늘 묵시록적인 메시지가 가득했다. 염세적인 그가 과연 사후에 어떤 곳에서 몸을 뉘고 있을지 내심 궁금해진다.

 

Writer

영화산문집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저자.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