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커상은 노벨상,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불린다. 1969년부터 시작된 이 상은 원래 영연방 국가 소설만 다뤘으나, 2005년부터 국제상이 신설되며 영어로 출간된 모든 소설로 대상을 확대했다. 2016년엔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부커 국제상을 받으며 국내에서도 이 상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됐다.

부커상은 수상 즉시 판매량이 대폭 상승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흔히 문학상이라면 어렵고 지루하기 마련인데, 부커상은 독자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을 택해 대중성이 강하다. 한국 출판계도 부커상 수상 작가를 적극적으로 시장에 내놓고 있다. 오늘 글에선 부커상 수상 작가 중 한국 독자에 유독 인기가 많은 '이언 매큐언'(1998년)과 '필립 로스'(2016년)의 대표작을 소개한다.

 

<에브리맨>(2006)

<에브리맨>을 읽고 뭔가 감상을 남긴다는 건 막막함 그 자체다. 노 작가 필립 로스가 죽음을 떠올리며 적은 이 짧은 소설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그득하다. 머리에 피가 흥건할 땐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누구도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던 막연한 암흑에 몸서리친다. 그야말로 '없음'이 나를 옥죄여온다. 가족도 친구도 결국 다 죽는다니 믿을 수 없다. 하지만 나이를 스무 살쯤 먹고, 이제는 뭘 좀 안다고 설치기 시작하면 죽음은 젊음 앞에서 자취를 감춘다. 늘 체육관에서 운동하고, 이성과 어울리니 생명력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리고 서른에 다다르면 바쁜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 잠을 청하기 바쁘다. 오늘처럼 노트북을 앞에 두고 죽음 따위를 적는 건 넋두리에 불과하다. 소멸에 대한 공포는 눅눅한 공기처럼 아스라한 자취로만 남아있다. 우선 알람을 이른 아침에 맞추고 자그마한 화면에 눈을 두다 잠을 청하기 바쁘다.

"입을 메우고, 눈을 가리고, 콧구멍을 틀어막고, 귀를 닫는 것 같았다. 그는 그들에게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더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싶었다. 그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덮고, 아버지가 생명을 빨아들이는 통로를 차단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저 얼굴을 보아왔어. 내 아버지의 얼굴을 흙 속에 묻지 마. (중략) 맙소사 그는 생각했다. 한때 나였던 남자 나를 둘러쌌던 생활, 나의 것이었던 힘. 그때는 어디에도 이질감은 느낄 수 없었다. 한때는 나도 완전한 인간이었는데."

에브리맨(보통 사람)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미국 유대인 이민자 3세대로, 가족과 종교를 숙명처럼 받들던 아버지 세대와는 달리 자유분방한 삶을 산다. 그는 양질의 교육을 받고 유명 광고회사 아트디렉터로 취직한다. 타고난 심미안과 탁월한 감각 덕에 하는 일마다 큰 성공을 거둔다. 거기에 큰 키와 이목구비가 뚜렷한 외모, 단단한 지성과 능수능란한 화술까지. 그는 이런 무기로 수많은 여자와 동침하고, 뉴욕의 대형 아파트에서 세 번의 결혼을 거친다. 그는 거의 평생을 평범과는 거리가 먼 화려한 삶을 누린다. 하지만 쉴 틈 없이 변속기를 놀리던 그에게 어느 날 죽음이 드리운다. 소설은 끝내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무덤가를 배회한다.

"조수가 밀려오고 밀려 나가는 것을 한참 지켜보다 보면, 바다를 바라보며 백일몽에 빠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렇듯이 자신에게도 삶이 우연히 예기치 않게 주어졌으며, 그것도 한 번만 주어졌으며, 거기에는 알려진 또는 알 수 있는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을 다룬 무수한 문학이 있다. 하지만 정작 '늙음'과 마주하는 기백을 가진 작품은 드물다. 죽음이야말로 문학의 본원으로 불리지만, 늙음엔 도망칠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우린 그가 다량의 수면제를 집어 들 때까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없는 집엔 어떤 음습한 것이 있는지 그저 지켜볼 뿐이다. 생의 이면을 바라보려는 결의 없이는 소설에서 쉽게 노년을 다룰 수 없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막막함이 위로되기도 한다. 누구나 늙음이라는 명제 앞에선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을 읽고 나면 죽음이란 지극히 사적이고, 그 고독에 발붙일 수 있는 위안이란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작가는 화려했던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병과 싸우다 죽은 남자를 통해 사멸해가는 존재의 숙명을 적는다. 소설은 장례식에서 시작됐으며, 누군가의 인생은 결국 그 마무리를 위한 회귀의 과정은 아닌지 낮게 읊조린다. 그는 결국 죽음의 무턱에서 아스라한 삶의 환희를 떠올리며 눈을 감는다.

필립 로스는 말한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죽음은 곳곳에 널려있지만, 그걸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한 젊음은 거리마다 팽배하다. 술자리에서 친구들은 욕지거리를 섞어가며 연봉과 집값 얘기에 여념이 없다. 이제 결혼해서 자식도 낳겠다며 너스레를 떤다. 어떤 녀석은 인생 좋은 때는 다 갔다며 젊은 시절을 회고한다. 그들의 어른 됨엔 망설임이 없다. 난 어떤 기억을 가지고 노년을 맞이할까. 나도 저들처럼 소실점으로 오므라들까. 필립 로스는 2009년 한 인터뷰에서 소설이 사멸하리라 예측했다. 영화와 TV가 인류의 사고를 장악할 거라며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그리고 2012년 권투선수 '조 루이스'의 말을 인용하며 내가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남기고 은퇴를 선언한다. 그는 세상 돌아가는 꼴이 늘 못마땅했고, 공공의 시대정신이 개인을 나락에 떨어뜨렸다며 분개했다. 2018년 5월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언론은 그의 문학이 아닌 노벨상을 타지 못한 비운을 조망한다. 그가 평생을 거쳐 적어 온 가치는 그의 예측처럼 빠른 속도로 잊히고 있다. 그 역시 타오르는 바다의 초상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죽음은 그 역시 마다하지 않고 삼켜버렸다.

"거친 바다 멀리 백 미터나 나간 곳에서 해변까지 대서양의 큰 파도를 타고 단번에 들어오던, 늘씬한 작은 어뢰처럼 상처 하나 없는 몸을 지닌 그 소년의 활력은 어떤 것으로도 꺼버릴 수 없었다. 아, 그 거침없음이며, 짠 물과 살을 태우는 태양의 냄새여! 모든 곳을 뚫고 들어가던 한낮의 빛이여. 그는 생각했다. 여름의 매일매일 살아 있는 바다에서 타오르던 그 빛이여."

 

<속죄>(2001)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가 인류를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로 ‘소문’을 꼽는다. 말이 퍼져나가는 과정을 통해 언어는 성숙했고, 피치 못할 과장이 사소한 위험이라도 경계하게끔 했다고 분석한다. 그렇기에 진화의 범주에 거짓말이 있어도 놀랄 게 없다. 이는 언어가 사고와 세계관을 규정한다는 ‘언어 결정론’과도 연결고리를 가진다. 언어가 사고를 제한한다는 혐의를 받기도 하지만 거짓말은 상상과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세계를 확장했다. 보고 들은 것에 그쳤던 생각은 상상을 통해 허구라는 날개를 달고 에덴동산에 이른다.

거짓말에 대한 소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소설 <속죄>다. 이 소설의 훌륭한 점은 창작과 거짓말이 얼마나 닮아있는가를 이야기의 동력으로 삼기 때문이다. 무더운 여름날 13살 소녀 '브리오니'는 창밖을 통해 괴이한 광경을 목격한다. 옷을 벗어던지고 정원 분수대에 들어가는 친언니 '세실리아', 그런 세실리아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잡역부의 아들 '로비'. 창작을 낙으로 삼는 13살 소녀는 이 상황을 제 관점에서 해석한다. 스스로 어른이라고 믿는 풋내기 소설가답게 상황을 자극적이고 적나라하게 과장한다. 고적한 분수대와 옷 사이로 비치는 세실리아의 마른 몸, 로비의 거친 눈빛. 그날 때마침 브리오니의 사촌 '롤라'가 괴한에게 강간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알 수 없는 확신에 찬 브리오니는 로비를 강간범으로 지목해 누명을 씌운다. 브리오니는 첫사랑의 열병과 그로 인한 상처, 달뜬 감정을 휘몰아 한 편의 치정극을 완성했다. 무리한 각색과 서투른 연출이 빚어낸 파열은 거대한 비극의 실마리가 된다. 그리고 수년이 흐른 후, 이제 성인이 된 브리오니는 이 사건을 한 편의 소설로 집필한다.

대지주의 딸, 저택의 정원, 전쟁의 참상이 머릿속을 빙빙 떠다니는 <속죄>에서 비극은 소녀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문학과 현실을 혼동한 브리오니는 어떤 변명으로도 덮지 못할 거짓말로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쳐버린다. 자기기만이 세계의 균질함을 파괴하고, 시대의 비극에 휘말린 연인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렇다면 죄를 저지른 브리오니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어떻게 로비와 세실리아에게 속죄할 수 있을까. 이제 나이가 든 소설가 브리오니는 작품을 고치고 또 고쳐 쓴다.

브리오니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관철하기 위해 사실을 비틀었다. 고전 소설에 심취했던 소녀는 따분한 일상에서 비극을 창조했다. 비극이란 문학의 윤택한 언덕이니까. 자기 연민이 가득 찬 사춘기 소녀에게 연인의 배신과 엇나간 섹스는 얼마나 황홀한 소재인가. 브리오니의 거짓말은 로비를 전장에서 죽게 했고, 세실리아는 죄의식에 갇혀 평생 가족과 떨어져 고립한다. 결국 브리오니는 끝내 현실 속 두 사람에게 속죄할 기회를 잃었고, 되돌릴 수 없는 바를 바로잡기 위해 문학의 영역에서 구원을 찾아 나선다.

난 항상 독서를 하며 조금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사려 깊게 생각하길 바란다. 궁극적으로 더 나은 인간이 되길 바라며 책장을 넘긴다. 더 나은 거짓말과 더 나은 삶을 위해 손바닥을 비빈다. 그녀는 비로소 잠을 청할 수 있다. 자신은 결국 용서받지 못할지라도 이야기 속의 로비와 세실리아는 문학의 영역으로 구원이 가능하기에. 브리오니는 펜을 들고 로비와 세실리아 두 사람이 자신을 용서하지 않고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를 적는다. 죄 많은 자신은 평생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외롭게 죽을 거라며 저주한다. 그런 이야기도 가능하다며 어렵사리 구두점을 찍는다.

<속죄>의 저자 이언 매큐언은 911 테러 사건이 발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 <가디언>에 이런 논평을 남긴다.

“비행기 납치범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승객들의 생각과 느낌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면, 이런 일을 계획했더라도 끝까지 진행하진 못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할까, 어떻게 느낄까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며, 동정과 연민의 핵심이고, 도덕성의 시작이다.”

글을 쓰다 보면 내 글이 미치는 여파를 상상하게 된다. 미약하게나마 누군가를 엇나가게 하지는 않을까 염려하기도 한다. 언어가 빈약해지고 문화가 사라진 시대의 양상을 우려한다. 난 불안에 못 이겨 늦은 밤까지 책상에서 소설을 읽는다. 타인의 삶에 이입하며 문학이 이 삭막한 세계를 구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Writer

영화산문집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저자.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