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니 트리스타노(Lennie Tristano)의 음악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이 그를 쿨 재즈의 선구자라 부르기도 하지만, 그의 음악은 비밥이나 프리 재즈까지 넓게 걸쳐 있다. 그는 많은 레코딩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의 음악은 10년 이상 시대를 앞서간다고 할 만큼 독창적이었고 진보적이었다. 그는 괴팍한 성격의 시각 장애인 피아니스트로 알려졌는데, 순회공연을 계속 할 수 없어서 주로 집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리 코니츠(Lee Konitz), 원 마쉬(Warne Marsh), 빌 바우어(Bill Bauer)가 그의 문하생 중 많이 알려진 인물들이다.

Lennie Tristano Sextet ‘Wow’(1949). 리 코니츠(알토 색소폰), 원 마쉬(테너 색소폰), 빌리 바우어(기타) 포함

시카고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시력이 약했는데, 아홉 살 무렵에는 녹내장을 앓으며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세 살부터 피아노를 독학으로 시작했고, 시각장애인 학교에 다니며 색소폰, 트럼펫, 기타, 드럼 등 많은 악기를 배웠다. 열한 살부터 클럽에서 연주했고, 음악학교에서 학사를 취득하고 석사 과정에서 2년을 더 배웠다. 당시 재즈 신에서 이론적인 면이나 연주 경력 측면에서 그만큼 화려한 인물은 별로 없었다. 비밥 음반을 듣고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이주해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맥스 로치 등과 어울리며 연주했다. 찰리 파커는 그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스타일의 연주를 한다며 좋아했다고 한다.

세 번의 녹음을 합성한 ‘Turkish Mambo’(1954). 복잡한 멜로디와 리듬 구조로 구성되어 많은 논란을 낳은 곡이다

그는 시카고 시절부터 스튜디오나 클럽에서 연주를 하기보다는 개인 교습에 더 열중했다. 그의 레슨은 특정 악기의 연주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방향성이나 즉흥성, 복잡한 박자 전환이나 창의적인 자유를 중요시하였다. 또한 감정에 따른 연주가 아니라 설계에 따른 엄격하고 정교한 연주를 강조하였다. 그의 문하생들은 하나의 문파(Lennie Tristano School)를 이루어, 후일 쿨 재즈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49년에 문하생들과 함께 녹음한 ‘Intuition’이나 ‘Digression’은 오넷 콜맨의 프리 재즈보다 10여년 앞선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Intuition’(1949)은 프리 재즈의 선구적인 곡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 생활은 여의치 않았다. 두번이나 이혼의 아픔을 겪었고 개인 교습비에 의존하는 생활은 넉넉하지 못하여 자주 이사를 다녔다. 때로 문하생들과 콤보를 이루어 연주에 나섰지만 그것도 갈수록 줄어들었다. 1958년에 뉴욕의 하프 노트 클럽(Half Note Club)이 그가 선호하는 피아노로 교체하며 그를 설득하여 장기간 연주에 나섰고, 1960년대에는 유럽에서 솔로 피아노 투어에 나서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대중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은둔하며 레슨에 열중하다가 1978년 집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하였다.

리 코니츠, 원 마쉬와 함께 한 하프 노트 클럽 연주(1964)

그가 재즈 역사에 남긴 유산이나 영향력에 대해서는 평론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재즈의 즉흥연주를 가르친 인물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가 비밥이나 쿨, 또는 프리 재즈와 같은 특정 장르에 남긴 족적은 크지 않지만, 이들 장르로 넘어가는 혁신 과정에 끼친 그의 영향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지금도 그는 여전히 과소평가된 혁신가이며, 자신이 가르친 문하생들로 평가받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 Paris Jazz Festival에서의 솔로 연주(1965)

1960년대에 흥성했던 뉴욕의 하프 노트 클럽에는 출연했던 뮤지션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속설이 전해진다. “존 콜트레인은 대중을 모았고, 주트 심즈는 동료 뮤지션을 모았고, 레니 트리스타노는 지성인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