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출신의 1987년생 배우 맥켄지 데이비스. 그는 아름다운 은발 머리와 모델처럼 큰 키, 그리고 매력적인 마스크 외에도 사람들을 사로잡는 특별한 무엇을 가지고 있다.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큰 비중을 맡은 것도 아니었고, 화려한 연기력을 보여줄 시간도 없이 잠깐 출연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언제나 강렬한 여운을 남기며 우리의 시선을 붙잡곤 했다. 2019년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에서 많은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나, 예전부터 그를 눈여겨 본 사람이라면 그의 강렬한 존재감이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과 함께 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드라마와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홀트 앤 캐치 파이어> '카메론 하우' 역, <마션> '민디 파크' 역

드라마 <홀트 앤 캐치파이어> 속 한 장면

맥켄지 데이비스가 영화 <마션>에서 보여준 '민디 파크' 역은 그가 드라마 <홀트 앤 캐치 파이어>에서 보여준 IT 너드 캐릭터와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결은 다르다. <홀트 앤 캐치 파이어> 시즌 초반부에 등장한 '카메론 하우'는 솔직하고 당당하며,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 지 잘 알고 있는 천재 프로그래머다. 그는 여성 캐릭터의 가장 기본적인 전형에서만 겨우 벗어났을 뿐 극이 진행될수록 기존 드라마에서 소비되던 여성 캐릭터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진부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영화 <마션> 속 민디 파크는 극을 더 진취적으로 이끌어간다.

영화 <마션> 속 한 장면

민디 파크는 NASA 위성관리팀의 말단 직원이다. 모두가 와트니에 대해 잊어버렸지만, 민디만은 '와트니'(맷 데이먼)를 계속 추적하고 있었으며,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도 처음 발견했다. 곧 민디는 책임자의 직위로 진급한다. 맥켄지 데이비스는 다른 사람들이 신경쓰지 않은 와트니에 대해 무엇이든 척척 대답할 정도로, 무언가에 몰두할 뿐 아니라 자기 일을 유능하게 해내는 너드이자 천재 캐릭터를 잘 소화해냈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독특하고 확실한 정체성을 가진 캐릭터를 두루 선택하며 자신만의 다채로운 연기 커리어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2. <블랙 미러 시즌3 : 샌 주니페로> '요키' 역

이 드라마는 1980년대 샌 주니페로의 한 클럽에서 시작된다. '요키'(맥켄지 데이비스)는 섹스도 해본 적 없고, 타인과의 관계도 서툰 사람이다. 요키보다 더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의 '캘리'(구구 음바타로)는 요키를 리드하며, 그와 깊은 사이로 발전한다. 캘리 역시 요키에게 '그동안 여자에게 끌렸지만 혼자 속으로만 좋아했다'며 고백하고, 그들은 앞으로 두려워하지도 않고, 돌아서지도 않을 것을 다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만난 세계는 현실 세계가 아니었다. 그들이 만난 샌 주니페로는 일종의 가상공간이다. 치매 노인의 치료를 돕기 위해 실제 기억이 섞인 공간을 재현한 곳에 의식을 업로드 하면서 체험하도록 만든 공간이었던 것. 사실상 사후세계로 기능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버린 그곳. 곧 캘리와 요키는 현실 세계에서 할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드라마 속에서 요키와 캘리는 죽음과 자유, 그리고 의식의 해방에 대해 아름답고 섬세하게 풀어내며 캐릭터의 성장을 보여준다. 요키 캐릭터는 두려움에 맞서는 수직적인 성장에만 그치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캘리보다 더 빠르게 동성 결혼과 존엄사를 선택하고 캘리를 리드하며 자신의 삶을 장악하는 인물이다.

물론 어느 것이 더 나은 결정이란 답은 없다. 단지 자신이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고, 더 큰 모험에 뛰어드는 일. 그것이 비록 가상 세계에서 이뤄지는 일이라도 진정한 삶을 살아갈 자세일 것이다. 빨간색 컨버터블 자동차를 타고 해안가를 질주하며 뒤돌아보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으로 드라마는 결말에 다다른다.

 

3. <툴리> 툴리 역

'마를로'(샤를리즈 테론)는 이제 막 출산을 한 엄마다. 갓 태어난 아기와 아직 챙겨줄 게 많은 딸, 그리고 남들과 좀 다른 아들을 함께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 남에게 아이를 맡길 수 없다고 고집 부리던 그는 결국 야간 보모의 도움을 받기로 한다. 그런데 찾아온 야간 보모 '툴리'(맥켄지 데이비스)는 궂은 일을 단 한 번도 해본 적도 없어 보이는 스물여섯 살의 젊은이다. 마를로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느낀 툴리는 대답한다. "저는 당신을 돌보러 왔어요."

정말 그의 말처럼, 툴리는 표면적으론 갓 태어난 셋째 아이 미아를 돌보지만, 궁극적으론 마를로를 함께 돌본다. 툴리는 마를로 대신 8년 묵은 바닥의 때를 벗겨주고, 밤새 컵케익을 굽고, 요리할 시간조차 없던 마를로가 마음껏 실력발휘를 할 수 있도록 여유까지 허락한다. 그러나 만일 여기서 끝났다면 툴리의 돌봄은 단순히 전통적인 엄마 역할을 돕는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툴리는 어쩐지 엉뚱하고 이상하지만 알 수 없는 생명력, 에너지를 타인에게 전이시키는 인물이다. 그는 마를로와 함께 영화를 보고, 샹그리아를 나눠 마시며 정서적 교감을 나눈다. 심지어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고,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했던 마를로와 남편의 부부 관계까지 적극적으로 해결해준다. 이전까지 마를로가 시도하지 못했던 남편과의 환상적인 잠자리까지 말이다.

마를로는 툴리를 만난 후 "다시 색깔을 보게 된 기분"이라고 말한다. 그는 툴리와 함께 브루클린 시내로 탈주하여 그동안 즐겨보지 못했던 자유를 만끽하고 엄마로 살면서 잊어버렸던 '자신'을 되찾는다.

그렇게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툴리와의 만남도 어느새 끝이 보인다. 병원에서 남편이 마를로의 결혼 전 성이 '툴리'였다는 것을 말하면서, 관객은 툴리의 진실을 알 게 되는 것. 그러나 마를로는 이미 툴리의 정체를 눈치채고 있던 것 같다. 그는 자연스럽게 툴리와의 이별을 받아드린다.

툴리를 단순히 마를로의 환상이나 자아분열이라 단정짓기는 어렵다. 툴리는 마를로가 '위험지대를 건너는 것을 도와주러' 온 또 다른 자신이며, 과거에서 온 구원자다. 툴리는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꿈이 있고, 가능성이 있으며, 긍정적인 마음으로 활기차게 살아가던 한 여성, 한 인간이던 마를로를 되찾게 해주었다. 마를로는 이제 자신으로 사는 법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자전거 타기나 수영처럼 순간 잊은 것 같아도 몸에 영원히 새겨져 버린 감각인 것이다.

<툴리> 예고편

 

4. <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 '그레이스' 역

2019년 터미네이터가 돌아왔다. 사실 더 이상 새로울 수 없는 이야기인 터미네이터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를 통해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와 여성 캐릭터들의 역할을 재정립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남자 주인공들이 모든 걸 부수고 복수하는 영화들은 너무 많다." 감독 팀 밀러가 전한 메시지다. 이 영화에서 달라진 건 미래 세계의 인류 저항군 병사였다가, 스스로 지원해 신체를 개조한 강화인간 '그레이스'(맥켄지 데이비스)와 미래의 세상을 변화시킬 인물로 그레이스가 보호하려는 '대니'(나탈리아 레예스)가 모두 여성이란 점이다. 그레이스는 다른 터미네이터와 다르게 인간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직접 자원하여 대니를 구하러 왔다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맥켄지 데이비스도 난생처음으로 액션 연기에 도전했다. 그는 수 개월에 걸쳐 고강도 군사 훈련과 극한의 스턴트 트레이닝으로 몸을 단련시켰고, 특수부대원의 바디 랭귀지까지 습득했다고 한다. 맥켄지 데이비스는 "군인과 운동선수의 몸 가짐을 그대로 익히고 싶었으며, 신체와 정신을 완전히 바꿔야 했다."고 기존 연기와 달라진 캐릭터 준비 과정에 대해 말한 바 있다.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의 그레이스는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그동안 강한 여성을 보여준 사라 코너와는 다른 여성 캐릭터를 보여준다. 사라 코너는 미래 세계를 구할 아들을 품은 '자궁', 즉 '어머니'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레이스는 자신의 몸에서 생명장치 기능을 하는 원동력을 꺼내 터미네이터를 멸살하고 직접 세상을 구하는 과정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그레이스 캐릭터가 더 입체적이었으면 하는 아쉬운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탄탄하게 단련된 맥켄지 데이비스의 근육질 몸과 그가 고강도 액션 연기를 훌륭하게 소화해낸 장면만으로 그레이스는 충분히 빛을 발한다. 맥켄지 데이비스가 도전한 그레이스는 여성 캐릭터 세계의 가능성을 넓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을 감상한 여성 관객들은 비슷한 감상을 내놓았다. 그들은 이제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레이스를 보며 말한다. "나도 저렇게 근육질 몸이 되어 세상을 구하고 싶다."고.

<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 예고편

 

Writer

나아가기 위해 씁니다. 그러나 가끔 뒤를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