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도시는 누군가에게 꿈처럼 남아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때가 되면 귓가에 내려앉는 크리스마스 캐롤처럼, 잠시 잊고 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가슴 뛰게 하는 선율처럼. 그리고 누군가는 그 흔적을 마음이 녹아내리는 기록으로 남긴다. 노란 불빛이 따스한 겨울, 이 계절에 가장 잘 어울리는 미셸 들라크루아의 그림처럼.

'Le Chevet de Notre-Dame en Hiver', 이미지 출처 - '알라딘'
'Just the two of us', 이미지 - 출처 'tutt'art'

누구에게나 있다. 영원할 줄 알았지만,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버린 시절 하나쯤. 1940년의 파리, 일곱 살 소년의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은 동화 같았다. 하루하루 기대할 것이 많아 신나고 적당히 눈에 익어 편안하던 날들. 사실 나치에게 점령당한 시절이었다는 건 꽤 나중에야 알았다. 시대를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던 소년에게 도시는 그렇게 꿈결 같은 이미지로 남았다. 다시 돌아오지 않아 더욱 반짝이는 이름, 유년 시절이었다.

'Concours d'Attelage aux Champs-Elysees', 이미지 출처 - 'Pinterest'
'Montecristo- Le Cigare des Arts', 이미지 출처 - 'Alchetron'
'Le Coeur de Paris au ciel rose', 이미지 출처 - 'Rakuten'

어떤 기억은 파도 같아서 저만치 밀려갔다가도 예상치 못한 순간 불쑥 찾아오곤 한다. 그 사이 소년은 태어난 곳을 한 번도 떠나본 적 없는 어른으로 자랐다. 도시는 여전히 같은 곳에 있지만, 예전과 같지 않은 풍경이 되었고, 한때 존재했으나 더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을 잔상처럼 덧입곤 했다. 그가 생각하는 파리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눈앞에서 자꾸만 되살아났다가 부서지고 있었다. 예술의 도시에 머무는 것을 행운이라 여기는 미술학도였던 그는 마침내 눈앞의 풍경을 캔버스에 옮겨 담기 시작했다.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파리의 모든 순간을 기록해 온 미셸 들라크루아(Michel Delacroix)의 여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Le Moulin Rouge', 이미지 출처 - 'Pinterest'
'Le Pont-Neuf Le Soir', 이미지 출처 - 'Gallery Direct Art'
'La Place Vendome', 이미지 출처- 'Hugo Galerie'

이곳엔 파리, 하면 떠오르는 장소들이 빠짐없이 들어 있다. 화염이 삼키지 못한 노트르담 대성당과 고즈넉한 시테섬, 사람들이 오가는 퐁네프 다리와 붉게 타오르는 물랭루즈, 다녀온 적 없는 사람조차 추억에 잠기게 하는 부드러운 풍경들.

묘하게 낯선 분위기를 감지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고풍스러운 자동차 틈으로 또각또각 지나다니는 마차, 한껏 부풀린 드레스를 입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 그러니까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 곳, 먼 옛날과 오늘 사이의 어디쯤인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들라크루아의 파리는 익숙한 얼굴을 한 낯선 사람이 된다.

'L'arc de Triomphe', 이미지 출처 - 'Pinterest'
'Les Grands Boulevards le soir', 이미지 출처 - 'Pinterest'
'Noel! Noel!', 이미지 출처 - 'Flickr'

그런데도 모르는 척 인사를 건네보고 싶어지는 건 어둠이 내린 후 바라보는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쪽빛 하늘이 진홍빛에서 군청색으로 물들고 거리에 가로등이 켜지는 순간, 도시는 조용히 마법에 걸린다. 달빛을 타고 하얗게 눈이 흩날리는 겨울밤은 더더욱 매혹적이다. 카페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길가 위로 노랗게 퍼질 때, 어깨를 맞댄 연인들이 반짝이는 풍경 속으로 젖어들 때, 꼬마들이 팔짝거리며 크리스마스 트리 주변을 기웃거릴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리는 밤의 장막을 걷고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Paris la Nuit', 이미지 출처 - 'Pinterest'
'Au petit bleu', 이미지 출처 - '2448 아트스페이스'

누구에게나 하나쯤 있다.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따뜻했던 시절, 돌아보면 그 자체로 아름다웠던 저마다의 벨 에포크. 미셸 들라크루아가 기록한 파리는 스스로의 벨 에포크였다. 혹시라도 영원히 머무를 수 있을까 싶어 꼬마 때의 모습까지 그려넣은 곳. 하지만 가장 아름다웠고 그래서 늘 그리워했던 시절은 늘 그의 곁에 있었다. 기억 속 풍경을 캔버스에 옮기는 동안, 새로운 나날들도 함께 엮여 나갔으니까. 그 하루하루가 모여 한평생을 이루었으니 결국 들라크루아의 생애는 그 자체로 영원한 벨 에포크였던 셈이다.

'Paris, à vol d'oiseau', 이미지 출처 - '2448 아트스페이스'
'Declaration d’amour sous la neige', 이미지 출처 - 'Pinterest'

시기도, 그 모습도 제각각이지만 우리는 한 번쯤 벨 에포크를 품는다. 지나고서야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우리, 어쩌면 모르고 있었을 뿐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 유난히 반짝이는 들라크루아의 파리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해 본다.

 

Writer

언어를 뛰어넘어, 이야기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마음속에 새로운 씨앗을 심어주고,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가 되어주니까. 그래서 그림책에서부터 민담, 괴담, 문학, 영화까지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중. 앞으로 직접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며 더 풍성하고 가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나가기를 꿈꾸고 있다.
전하영 블로그 
전하영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