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년도에 만들어진 영화 <블러드 심플>(1984)이 지난 10월 국내에 개봉했다. 뒤늦은 개봉도 화제였지만,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은 이유는 <블러드 심플>이 코엔 형제의 데뷔작이기 때문이다. 예고편을 먼저 만들어서 투자자들에게 보낸 뒤 제작비를 모아서 만든 데뷔작 <블러드 심플>부터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카우보이의 노래>(2018)까지, 코엔 형제는 늘 영화를 만들고 있다. 대기만성형의 감독이 있는 반면, 코엔 형제는 데뷔작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여줬다. 

코엔 형제는 잔인한 세상을 폭력과 위트를 섞어서 냉소적으로 보여준다. 발버둥 칠수록 수렁에 빠지는 인물들이 겪는 아이러니는 사건의 경중에 차이가 있을 뿐, 결국 세상을 사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다. 비극조차도 우스꽝스럽게 다루는 코엔 형제의 영화는 냉혹한 세상만큼이나 무시무시하다. 시작부터 천재적이었다는 걸 느낄 수 있는, 코엔 형제가 2000년대 이전에 발표한 초기작들을 살펴보자.

코엔 형제(왼쪽이 형 조엘 코엔, 오른쪽이 동생 에단 코엔)

 

<블러드 심플>

술집을 운영하는 '마티'(댄 헤다야)는 사립탐정 '로렌'(M.에멧 월시)에게 의뢰해서 자신의 술집에서 일하는 '레이'(존 게츠)와 부인 '애비'(프란시스 맥도맨드)가 불륜 관계라는 걸 알아낸다. 레이와 애비는 마티에게서 도망칠 생각을 하고, 마티는 로렌에게 두 사람을 죽여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차례차례 어긋나기 시작한다.

<블러드 심플>(1984)은 제1회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으며 코엔 형제의 등장을 알린 작품이다. 주연을 맡은 프란시스 맥도맨드는 <블러드 심플>을 시작으로 코엔 형제의 페르소나로 많은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다. <아담스 패밀리>(1991)와 <맨 인 블랙>(1997) 시리즈로 유명한 베리 소넨펠드 감독은 코엔 형제의 초기작 <블러드 심플>, <아리조나 유괴사건>(1987), <밀러스 크로싱>(1990)의 촬영감독이기도 하다. <블러드 심플>로 처음 호흡을 맞춘 음악감독 카터 버웰은 이후에도 코엔 형제가 연출한 작품 대부분의 음악을 맡는다.

<블러드 심플> 트레일러

<블러드 심플>은 서론을 최소화하고 빠르게 본론으로 넘어가서 내내 질주하는 영화다. 인물들 사이에 오해가 생기고, 오해는 큰 파급효과를 일으킨다. 뜨겁게 달리던 영화가 끝나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코엔 형제가 가진 세계관과도 통한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삶이 보여주는 결론은 허무하다. <블러드 심플>이 위대한 데뷔작인 이유는 기술적인 부분보다도 욕심부리고 싶을 첫 작품에서 신인답지 않은 냉소적인 태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밀러스 크로싱>

떠오르는 마피아 조직의 보스 '캐스퍼'(존 폴린토)는 가장 큰 마피아 조직의 보스 '리오'(알버트 피니)에게 도박사업을 방해하는 '버니'(존 터투로)를 넘겨달라고 요청한다. 리오의 오른팔 '톰'(가브리엘 번)은 싸움을 피하고자 버니를 내주자고 조언하지만, 리오는 애인 '버나'(마샤 게이 하든)의 동생 버니를 넘겨줄 수 없다고 말한다. 톰은 버나와 내연 관계로, 이를 숨긴 채 리오의 신뢰를 얻고 있다. 톰과 버나의 내연 관계는 계속되는 가운데, 캐스퍼 세력과 리오 세력의 갈등은 깊어진다.

코엔 형제는 데뷔 후로 누아르부터 서부극까지 다양한 장르를 소화했지만, 늘 위트와 함께 해왔다. <밀러스 크로싱>(1990)은 갱스터 영화로 분류할 수 있지만, 블랙코미디로 볼 수 있을 만큼 위트로 가득하다. <밀러스 크로싱>으로 코엔 형제와 처음 호흡을 맞춘 존 터투로와 스티브 부세미는 이후에 코엔 형제와 여러 작품을 함께 하며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밀러스 크로싱> 트레일러

톰이 보여주는 탁월한 판단력은 그의 냉정함에서 비롯된다.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인물들 사이에서 그는 어떤 욕망도 없는 사람처럼 차갑게 군다. 오히려 그가 조금이라도 따뜻한 마음을 먹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위기가 찾아온다. 냉정함이 혼돈의 시대를 살아갈 해법이라는 건 슬픈 일이다. 톰이 냉소적인 태도로 일을 해결해 나가면서 느낄 수 있는 건 보람이나 개운함이 아니라 씁쓸함 뿐이지 않을까.

 

<바톤 핑크>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를 쓰며 뉴욕에서 유명해진 극작가 '바톤 핑크'(존 터투로)는 헐리웃의 러브콜을 받고 LA로 간다. 영화사 대표 '잭 립닉'(마이클 러너)은 핑크에게 레슬링 시나리오를 써달라고 제안하고, 핑크는 낡은 호텔에서 투숙하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레슬링을 본 적도 없는 핑크는 시나리오를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옆방의 큰 웃음소리를 항의하다가 옆방의 투숙객 '찰리'(존 굿맨)와 친해진다. 핑크는 우연히 화장실에서 최고의 소설가로 불리는 'W.P. 메이휴'(존 마호니)를 만나고, 그의 애인이자 비서 '오드리'(주디 데이비스)와도 가까워진다. 핑크는 시나리오 마감이 다가오자 오드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예상치 못한 일을 겪는다.

<바톤 핑크>(1991)는 제44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감독상, 남우주연상까지 주요 부문을 휩쓴 작품이다.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와 처음으로 호홉을 맞춘 작품으로, <바톤 핑크> 이후로 로저 디킨스는 코엔 형제가 연출한 대부분의 작품에서 촬영을 맡는다. <바톤 핑크>는 창작자에 대한 작품이자, 넓게 보자면 ‘이야기’에 대한 영화다.

<바톤 핑크> 트레일러 

핑크는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를 쓴다면서 외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평범한 이들에 대해 쓴다면서 ‘평범한 이들’에 대해 규정하는 것도 모순처럼 느껴진다. 핑크의 눈에 형편없어 보이는 영화사 대표나 영화감독, 유명소설가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영화가 끝난 뒤 핑크는 이전과는 다른 이야기를 쓰고 있을까. 

 

<파고>

자동차 세일즈맨 '제리'(윌리암 H.머시)는 돈 많은 장인으로부터 사업자금을 받길 원한다.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장인의 돈을 얻기 위해, 제리는 은밀하게 소개받은 '칼'(스티브 부세미)과 '게어'(피터 스토메어)에게 아내 '진'(크리스틴 러드러드)을 납치해달라고 의뢰한다. 칼과 게어는 진을 납치하지만 일이 점점 꼬인다. 출산을 몇 달 앞둔 경찰 '마지'(프란시스 맥도맨드)는 남겨진 단서들을 토대로 사건 수사에 나선다.

<파고>(1996)는 제49회 칸영화제에서 감독상, 제69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은 작품이다. <파고>에서 코엔 형제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의상감독 메리 조프레즈는 지금까지 코엔 형제의 모든 작품에서 의상을 맡고 있다. 영화 <파고>를 원작으로 하는 동명의 드라마가 시즌 3까지 나왔고, 코엔 형제가 제작에도 참여했으며 2020년에 시즌 4가 방영될 예정이다.

<파고> 트레일러 

마지는 생명의 탄생을 몇 달 남긴 채, 돈 때문에 생명이 쉽게 죽어가는 현장을 목격한다. 마지는 돈보다 생명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당연한 진리에 해당하는 이 말은 <파고> 속 수많은 인물들 사이에서 공허하게 들린다. 곧 탄생할 자신의 아이가 세상이 얼마나 행복한 곳인지 물으면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엄마가 맡는 사건의 범인들은 왜 탄생하는지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코엔 형제가 꾸준히 던져온 냉소적인 질문들이 <파고>에서는 유난히 더 차갑게 느껴진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