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 같다'는 말이 있다. 곧고, 끝이 날카로우며, 재질이 단단하기까지 한 송곳처럼 무언가를 뚫을 만큼 날카로운 관점과 꿋꿋한 의지를 지닌 사람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2012년부터 활동을 시작해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활동해온 싱어송라이터 오늘도 무사히. 2019년 첫 정규앨범을 발표하기도 한 그를 설명할 때는 늘 '송곳 같다'는 수식이 뒤따른다. 그의 가사 속에 항상 사회적 문제와 고통받는 개인의 서사가 직설적으로, 그리고 비판적 시선으로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무사히 

부조리한 현실이 주는 괴로움을 오늘도 무사히 견뎌내고 헤쳐가자는 뜻일까? 그는 이름부터 '오늘도 무사히'다. 앨범 제목은 그의 노랫말이 담고 있는 날카로운 메시지와 시선을 고스란히 반영해 <송곳>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도 무사히의 노래가 그저 진지하고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일상을 있는 그대로 관조하기도 하고, 삶의 고통을 유머러스하게 웃어넘기기도 한다. 서정적인 멜로디와 따뜻한 연주 위로 호소력 짙은 그의 노래는 들을수록 귓가에 맴돌아 인상적인 가사를 함께 따라부르고 싶은 마음을 준다. 

오늘도 무사히 첫 정규 앨범 <송곳> 
오늘도 무사히 'Guilty' 
오늘도 무사히 '요즘 속담' 

2019년 초, 정규 1집을 발표 후 전국 주요 도시에서 쇼케이스를 가진 그는 자신의 삶터인 대구로 내려가 커피를 만들며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그런 그가 영상 리스트를 보내왔다. 요즘은 또 어떤 송곳 같은 생각들로 오늘을 무사히 보내고 있을까 궁금하던 차에 들려온 반가운 소식이었다. 고단한 일상과 세상을 바라보는 올곧은 이상이 교차하는 그의 세계 속 플레이리스트를 들여다보자. 

 

오늘도 무사히 says, 

사실 음악에 쏟는 시간보다 라떼 아트 연습에 쏟는 시간이 더 많아서 자신을 '음악가'라고 소개하기엔 조금 머쓱한 요즘, 이렇게 글을 쓴다는 게 참 겸연쩍다. 게다가 영상을 고르려고 하고 보니 막상 내 유튜브 저장소에는 라떼 아트 강의나 게임 공략 영상뿐이라 부끄럽고 난감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유튜브를 통해 영화와 드라마를 소개할 수도 있으니, 내가 사랑하는 작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정규앨범 <송곳>에 영향을 준 영상과 그로 인해 생기고 깊어진 단상들에 관해 적어본다. 

 

1. <왕좌의 게임> 시즌4 에피소드6 티리온 라니스터의 연설 영상 

HBO가 제작한 유명 드라마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2011~2019)에서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는 영상이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캐릭터 '티리온 라니스터(Tyrion Lannister)'의 감정을 실감나게 표현한 배우 피터 딘클리지(Peter Hayden Dinklage)의 열연도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무엇보다 줄거리 속 티리온의 울분 그 자체에 무척 공감했기 때문이다. 

부나 권력으로 둘째라면 서러울 위세 등등한 집안의 총명한 차남으로 태어난 티리온. 하지만 그는 선천적인 왜소증 환자이자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평생 멸시와 조롱을 받다가, 기어이 친부에 의해 누명을 쓰고 거짓 자백까지 강요받는다. 결국 그가 자신의 죄는 오로지 난쟁이로 태어난 것이며, 평생을 그 죄로 재판받아왔다고 자백하는 장면(”I'm guilty of being a dwarf. ... I've been on trial for that my entire life.”)은 눈시울을 붉힌다. 

하지만 그보다 더 슬픈 사실은 죄인이 아님에도 죄인 취급을 받는 티리온이 비단 드라마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잠시 주위를 둘러본다. 양보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30여 분 이상 기다리는 티리온. 모두가 고향을 향하는 명절에 타향에 남은 휠체어 신세의 티리온. 자신이 당해온 게 성희롱이나 성폭행이라는 걸 알지 못하고 그저 사람을 믿었을 뿐인 티리온, 사회복지사의 기분에 따라 영문도 모르고 두들겨 맞거나 보호와 교정이라는 명목으로 학대를 받아온 어리둥절한 티리온, 그리고 여전히 '병신'이라는 단어를 문제의식 없이 사용하는 이들로 인해 고통받는 수많은 티리온들. 

 

2. <본 투 비 블루>(2015) 

<본 투 비 블루> 예고편

이전까지 쳇 베이커(Chet Baker)를 전혀 몰랐던 내가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세 가지였다. 예고편에 흘러나온 음악,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영화의 색감, 에단 호크(Ethan Green Hawke). 그리고 그 세 가지는 내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재즈를 모르는 내가 듣기에도 그의 음악은 충분히 멋졌고, 과거와 현재, 인물이 처한 상황과 느끼는 감정에 따라 색이 다채롭게 변화하는 영상미는 아름다웠으며, 에단 호크의 연기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쳇 베이커가 스크린으로 살아 걸어온 듯했다. 누군가는 진부하다고 생각할 법한 줄거리마저 내게는 문제 될 게 없었고, 이 영화는 자연스레 내 인생 영화 목록에 올랐다. 관람 후 궁금증이 생겨 '쳇 베이커'를 검색해보기 전까지. 

영화를 보며 쳇 베이커가 그리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가벼운 구글링 한 번에 내 판단이나 심리적 저지선이 무너질 만큼 그가 방종한 인물인지는 미처 몰랐다. 쳇 베이커는 구제 불능 수준의 상습적 마약 중독자였고, 사기꾼이자 폭행범이었으며, 영화에서 그려진 것처럼 로맨틱한 인물이라기보다는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바람둥이에 불과했다. 결국 그는 웨스트 코스트 재즈 신의 최고 스타인 'Prince of Cool'에서 장례 치를 비용조차 남기지 못한 채 객사한 퇴물로서 자신의 삶을 마무리했다.

이후 내 머릿속에선 해묵은 논쟁이 다시 시작됐다. 예술 작품과 예술가의 윤리는 분리될 수 있을까? 음악과 음악가는 별개인가? 어쩌면 내 부족한 식견 때문에 이미 존재하는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정말 오랜 세월 부당하게 억눌려왔던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는 요즘이라면 이 해묵은 질문을 재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멀게는 친일 행적으로 비판받는 미당 서정주로부터, 가깝게는 성범죄로 구속된 연극인 이윤택까지. 한 번쯤은 생각해볼 만한 일이지 않은가. 

 

3.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5)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예고편

내겐 남에게 선뜻 말하기 쉽지 않은 취미가 있는데, 바로 장르문학 탐독이다.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1998)가 처음 읽은 작품이었으니 꽤 오래된 취미인 셈이다. 그런데 최근 장르문학 플랫폼을 뒤져보면, '회귀', '귀환', '환생', '전생' 같은 키워드가 포함된 작품과 MMORPG 게임 시스템을 차용한 작품들이 적어도 절반 이상이고, 그 대부분이 높은 순위에 등재되어 있다. 어쩌면 이는 오늘날 이 나라가 판타지 세계 속 설정처럼 기억을 지닌 채 시간 역행을 하거나, 노력한 만큼 경험치를 얻어서 성장하지 않는 이상, 개인 간 삶의 격차를 좁힐 확률이 희박하다는 공통적 인식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런 인식을 '웃픈' 방식으로 잘 드러내 준다. 전반적으로는 밝고 코믹하지만 계속 보다 보면 잔혹하고 우울하며 씁쓸한 기분이 드는데, 그건 아마도 주인공인 '수남'(이정현 분)의 상황이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아 쉽게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할 사람은 너 말고도 많다”는 말에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는 추가 근무수당이나 주휴수당이라든지, 각박한 생계 때문이든 동료에게 지울 업무 부담 때문이든 쉽사리 휴가를 내거나 심지어 마음대로 아플 자유도 없는 상황이라든지. 평범한 노동자의 근로 소득만으로 한 채의 집을 사기 위해 돈 한 푼 안 쓰고 10년을 모아야 하는 현실까지. 영화에서 보여주는 현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아마도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 경험이고 좌절이지 않을까? 

 

4. <인사이드 르윈>(2013) 

<인사이드 르윈> 중 데이비스의 'Queen Jane Song'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1960년대 미국에서 활동했던 포크 싱어송라이터 데이브 반 롱크(Dave Van Ronk)를 모티브로 삼아 창조한 등장인물 '르윈 데이비스(Llewyn Davis)'의 이야기다. 보다 상세히 말하자면, 히트곡 하나 없고 머무를 자신의 집도 변변찮아서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고, 심지어 겨울 코트조차 없어서 추운 겨울날 덜덜 떨며 거리를 오가는 이류 음악가의 삶을 그린 영화다. 그는 계속해서 무명 음악가로 살아가다가 명운을 걸었던 오디션마저 낙방하고 결국 음악을 그만둔다. 그렇다. 이 영화는 아주 우울하다. 하지만 만일 앞으로 남은 내 인생에 오직 한 편의 영화만 볼 수 있다면 주저 없이 선택할 만큼 가장 사랑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도대체 난 왜 이 영화를 사랑하는 걸까? 영화에 나오는 멋진 사운드트랙과 공연 장면이 모두 라이브라서? 재치 있지만 냉소적인 르윈의 성격 때문에 발생하는 ‘뻘하게’ 웃긴 상황을 특유의 헛헛한 표정으로 연기하는 오스카 아이작(Oscar Isaac)의 연기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1960년대 미국을 감상할 수 있는 특유의 멋스런 레트로 풍경 때문에? 사실 잘 모르겠다. 어느 하나 때문이라고 말하기에 이미 나는 이 영화를 쪼갤 수 없는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르윈이 마침내 성공해서 행복하게 살았더라면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그래왔다. 온갖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고 마침내 영광과 행복을 쟁취하는 이야기보다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나 환경 혹은 상황에 휩쓸리면서 고군분투하다 스러지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쏠렸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보다는 '한니발 바르카', '모차르트'보다는 '살리에르', '삼봉 정도전'보다는 '포은 정몽주', '우암 송시열'보다는 '백호 윤휴', '김일성'과 '이승만'보다는 '여운형'과 '조봉암'이 눈에 밟혔다. 

예술은 비극에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일까? 천재로 죽지도, 속물로 살지도 못한 이의 자기연민일까? 아니면 그저 노력할 의지가 박약한 나를 위한 변명일까? 이유야 어떻든 나는 우울한 아름다움에 끌리는 사람이라는 걸 이 영화를 통해 확신하게 됐다. 

 

싱어송라이터 오늘도 무사히는? 

'송곳 같은 음악'을 지향하는 싱어송라이터. 대중음악에서 흔히 다루지 않는 사회적 문제들을 가사로 지어 노래한다. 유기견의 시점에서 노래한 '술래잡기', 배우 등 예술가들의 좌절과 고독사 문제를 담은 '나의 배역', 밀양과 청도의 송전탑 문제를 바라보고 쓴 '늙은 꽃', 요즘 청년 세대들의 절망과 고독을 표현한 '요즘 속담', '이런 게 외로움이구나' 등 현실을 바라보는 진지한 시선과 이를 가사로 담아내는 위트 있는 표현, 호소력 있는 멜로디와 보컬을 지녔다. 장강명의 <표백>을 읽고 쓴 'The satellite'이나, 기형도의 시 '빈집'에 멜로디를 붙인 동명의 노래, 은희경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의 문장을 모티프로 삼은 '사실 나는' 등 문학을 비롯해 다양한 예술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곡도 많다. 2019년 2월, 첫 정규 앨범을 발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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