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어 마시는 홍상수의 겨울 영화엔 밤거리가 유독 잦다. 코트를 여미고 카페와 고갈비 집을 기웃거리며 낯선 생각을 한다. 그걸 엿보는 재미에 빠져 난 종종 그의 영화를 찾아본다. 좀 다른 생각을 하고 싶어서. 통념에서 한 걸음 떨어져 살고 싶어서. 그래서 난 요즘도 영화의 배경이 된 북촌과 종로 일대를 산책한다. 홍상수의 겨울이야기에 머물고파 되풀이해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다음 두 편은 유난히 겨울이 아름답게 그려진 홍상수의 영화들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영희'(김민희)는 남자의 연락을 기다린다. 저명한 영화감독이자 유부남인 그는 지금에 어디에 있을까. 함부르크의 한 공원에서 지인과 산책을 즐기던 영희는 느닷없이 녹슨 다리 앞에서 절을 올린다. 실연의 구렁텅이에 빠진 그녀는 그 순간 구원을 바랐을지도 모른다. 평생 믿지 않았던 존재를 향한 기도엔 무력감이 배어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큰 이야기 얼개 없이 오직 그녀의 기분을 좇기 바쁘다. 그녀의 슬픔, 고독, 분노, 오열, 자조, 체념. 배우 김민희는 너른 감정을 그러모아 한 그릇에 담아낸다.

제목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지만 영희 곁엔 늘 다정한 사람들이 함께한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강릉의 한 해변까지 영희가 홀로인 시간은 드물다. 지인들은 그녀를 위해 술자리를 열고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등을 토닥인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우리도, 함께 술을 마시는 그들도 그녀가 혼자임을 안다. 그녀의 얼굴에 서린 쓸쓸함은 떨쳐내려 해도 사라지지 않는 고독이다. 짙게 드리운 슬픔이 스크린 위로 팽배하다. 추운 강릉의 어느 커피집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영희는 스러질 것처럼 나약하다. 아무리 주변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해도 상실을 머금은 이는 일상을 배겨나기 어렵다. 영희는 지금 겉돌며 간신히 버티고 서있다. 그리움은 통증과 같아서 매 순간이 혹독하다. 여차하면 무너져버릴 것 같은 고독. 위태로운 걸음과 널뛰는 감정. 영화엔 그녀의 감정만이 오롯하다.

영희는 책을 읽고 싶다고 말한다. 어려서 공부가 부족했고, 지금은 시간이 지천이니 독서를 해보겠다고 말한다. 난 그녀에게 책이 있다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책장을 넘기며 고독으로 말미암은 안식을 얻기를 바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릉의 한 횟집에서 남자를 마주한 영희는 그에게서 한 권의 책을 선물을 받는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 <사랑에 관하여>. 그는 낭독을 청하는 그녀에게 한 구절을 소리 내 읽는다.

"헤어질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 객실 안에서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우리는 둘 다 자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난 그녀를 끌어안았고 그녀는 내 가슴에 몸을 맡겼습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그녀의 얼굴, 어깨 그리고 젖은 손에 키스할 때, 그때 우리는 정말 불행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심장이 타버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 그때야 비로소 우리의 사랑을 방해한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불필요한 것이고, 사소한 것이고, 기만적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영화는 해변에 누워있던 영희가 스크린 밖으로 걸어 나가며 끝난다.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뜨고 모래를 털고 걸어가는 그녀는 괜찮아 보인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결연한 의지가 비어져 나오고, 객석에 앉은 나는 응원하는 마음으로 턱을 치켜든다. 살아있음을 느끼며 극장을 빠져나왔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무던히 춥던 날 '함춘수'는 자신의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GV 행사에 참여하려고 수원으로 향한다. 그는 꽤 심심했던지 하루 일찍 도착해 호텔방을 잡고 화성행궁 근처를 돌아다닌다. 너덜너덜한 옷을 입은 함춘수는 예술영화 몇 편을 만든 먹물 감독이다. 부가적으로 덧붙이면 여자 같은 사람을 보면 한없이 감동하는 남자다. 커피를 들고 두리번거리던 그는 행궁 내에 있는 복내당에 들른다. 그는 느닷없이 '복내(福內)'란 단어를 상기한다. "일으켜 얻는 것은 밖으로부터고, 복을 생겨나게 하는 것은 안으로부터다." 그때 햇살이 내리쬐는 평상에서 바나나 우유를 마시는 '윤희정'과 마주친다. 정말 복이 생겨난 것일까.

겨울이 오니 눈 오는 수원을 배경으로 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가 떠오른다. 15년 여름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이 영화를 봤다. 상영관을 나와 이끌리듯 곧장 1호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수원에 가서 행궁 주위를 배회하며 그들이 머물던 공간을 사진으로 남겼다. 눈발이 날리는 허름한 골목에서 커피를 사 마시며 마음을 녹이는 함춘수와 윤희정을 떠올렸다.

윤희정은 귀여운 여자다. 그녀는 가끔 모델 일을 하지만 주로 그림을 그리며 산다. 두 사람은 대화가 잘 맞는다고 느꼈는지 한껏 들뜬 모양이다. 어느새 자리를 옮겨 차를 한잔하며 담소를 나눈다. 서로를 알아가니 몸이 스르르 풀린다. 늦은 밤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분에 심취한 두 사람은 애틋한 마음을 고백한다. 그들은 희정의 작업실(행궁동 레지던시)에서 시작해 초밥집(이찌마라 스시), 전통찻집(시인과 농부), 수원 팔달산 아래 불상이 눈에 들어오는 희정의 집 앞까지 거닌다. 문득 강원도로 떠나버릴까 고민하던 두 사람은 손을 흔들며 헤어짐을 받아들인다.

영화가 독특한 건 이야기가 두 번 반복된다는 점이다. 지금과 '그때'와 '지금'이 연이어 등장하며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 지 보여준다. 어려울 것도 복잡할 것도 없는 이야기다. 진심이 동할 때 맞아 들어가고, 거짓으로 일관하면 어김없이 틀려먹는다. 그러는 새 과거와 현재가 섞여들고 시간과 공간이 모호해진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순간이 커피 프림처럼 서로에 스며들고, 살을 에는 추위는 달뜬 육체 앞에 누그러진다. 그래서 이야기를 반복해도 결과는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렸지만, 다시 만나진 않을 것이다. 홍상수의 수원 여행이 다시 있으리라 믿을 수 없고, 희정이 그 귀여운 얼굴로 서울로 떠난 춘수를 굳이 찾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은 흘러갔고 진심도 그 순간뿐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우연에 의해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생은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한낱 그림자에 가깝다. 일상이 아무리 잔혹하다 할지라도 찰나에 가까워 견딜만하다. 영화는 현재를 응시하며 통념의 찌꺼기를 털고, 위악과 전형에서 벗어나 진실을 털어놓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랬다면 어땠을까. 저랬다면 나았을까. 고민하고 자책하지만 그건 기억이 만든 회한에 불과하다. 술안주에나 어울리는 주전부리처럼 바삭할 뿐 이내 스러진다. 취해 처자식을 생각하는 춘수와 다른 약속이 있다고 자리를 뜨는 희정은 주저하다 이내 엇갈린다. 어그러진 말들이 장난처럼 오가고, 속내를 감추고 떨쳐낸 사심이 속살처럼 올라올 때 영화는 처연히 사라진다. 혹독한 날씨에도 꽃이 피고 지듯이 인연은 미련을 품고 멀어져 간다. 그게 이 겨울을 견디게끔 한다.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