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다. 이별은 왜 이렇게 늘 성급하게만 느껴지는지. 한여름의 더위도, 가을의 청명함도 다 떠나고 이제 그저 춥고 외로운 계절만 남았다. 얼마 안 있어 2019년, 2010년대와도 이별이다. 이런 텅빈 마음을 채우고, 스산한 마음을 덥혀줄 11월 국내 신보 4장을 모아 봤다.

* 앨범 발매순

 

8BallTown <Slow Step>(2019.11.01)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으러 레트로 특공대 8BallTown(에잇볼타운)이 출격한다. 2010년대 들어 1990년대 초 가요풍 음악과 영상을 모티프로 삼아 꾸준히 작업물을 만들어내고 있는, 오늘날 뉴잭스윙 리바이벌의 원조 격이자 대표 주자인 기린. <Slow Step>은 이런 그가 2015년 설립한 독립 레이블 에잇볼타운의 뮤지션들이 총출동한 첫 번째 컴필레이션 앨범으로, 기린을 비롯해 재규어중사, 클로이 드 피타, 주럼퍼그, 플라스틱 키드, 브론즈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말한다. 연말이 가까워짐에 따라 점점 추워져만 가는 요즘 따뜻한 음악들로 앨범을 채웠다고.

에잇볼타운 앨범 <Slow Step> 전곡

앨범은 대부분 느린 템포의 R&B 무드가 가미된 곡들로 구성된 채 이를 듣는 시종일관 부드럽고 달콤한 감성을 자아낸다. 첫 트랙 '한 걸음'부터 무척 매력적이다. 비음 섞인 재규어중사의 가성이, 너에게 한 걸음씩 다가겠다는 가사처럼 박자를 맞추며 천천히 전진하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천연덕스럽게 그루브를 탄다. 제목과 가사에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 터뜨리게 되는 은근한 유머와 재기가 한편으로는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달콤한 낭만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언제나처럼 장난스러움과 진지함이 반씩 섞인 이들의 캐주얼한 음악에 귀와 몸을 맡기면, 정말 어느새 추위가 사라진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에잇볼타운 인스타그램

 

카코포니 <夢(Dream)>(2019.11.08)

인디포스트에서 앞서 11월 공연 소식을 전한 바 있는 싱어송라이터 카코포니.(링크) 그는 스물한 살 대학생 시절, 쥬마루드로서 활동하며 2곡의 싱글을 발표한 바 있다. 그 후 잠시 음악을 접었던 카코포니는 2018년 1집 <和(화)>로 돌아와 자신의 깊고 내밀한 상처들을 처절하게 표현한 가사와 드라마틱한 노래, 이를 다채로운 일렉트로닉 사운드로 소화해낸 앨범의 입체적이고 팝적인 구성으로 호평을 받는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발표한 2집 <夢(몽)>은 앞선 슬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위로'를 담아내며 그만의 성장한 스토리텔링을 들려준다.

카코포니 '이 우주는 당신'

사실 카코포니의 전작은 슬픔과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로 점철된 작품이었다. 때때로 희망과 견딤을 말하기도 했지만, 이는 어두운 절망과 고통에 비하면 한없이 가느다란 끈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번 앨범에서 그는 본격적으로, 훨씬 더 적극적으로 희망과 위로를 노래한다. 물론 '당신'을 '우주'로 표현할 만큼 뜨겁게 사랑을 노래하던 화자('이 우주는 다신')는 이내 균열을 맞이하고('X') 끔찍한 이별 속에서 당신을 증오하기도 한다.('제발') 하지만 결국 그를 그리워하며('온 밤(feat. 유승우)') 아름다운 이별을 받아들인다.('Parallel world') 그리고 다시 사랑을 할 수 있는 원래의 나로 돌아온다.('귀환')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도는 우리의 인생을 묘사한 듯한 앨범의 구성에서 카코포니가 자신의 감정만으로 가득 채웠던 전작으로부터 더 나아간 보다 성숙한 고백과 메시지를 담으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카코포니 인스타그램

 

히피는 집시였다 <불>(2019.11.18)

JFlow의 실험적인 비트와 R&B 장르 다른 노래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신선한 여백미, 특유의 팔세토 창법으로 고음을 자유자재로 소화하는 Sep의 매력적인 가창력으로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한국대중음악상 두 차례 노미네이트 및 한 차례 수상을 거머쥔 듀오 '히피는 집시였다'. 이들은 2017년 1집 및 지난해 2, 3집에 이어 다시 1년 만에 네 번째 정규앨범으로 돌아오며 실력뿐만 아니라 왕성한 활동력까지 증명하고 있다. 이번 앨범의 주제는 '불'. 불 피우는 과정을 순서대로 설명한 추상적이고 난해한 앨범 소개문이 눈에 띈다. <불>은 도대체 어떤 음악일까?

히피는 집시였다 ‘땅거미 (with 우원재)’

대체로 '불'에 관한 가장 단순한 은유는 그것의 뜨겁고 일시적인 속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러나 히피는 집시였다가 음악으로 완성한 앨범 <불>은 불의 보다 다양하고 복잡한 이면을 파고든다. 불을 피우는 데 필요한 시간과 노력, 열정이나 젊음이 주는 이미지의 부정적인 이면, 자연에서의 불의 속성을 완성하거나 보충해주는 또 다른 추상적 이미지들이 여러 방식으로 나타난다. 짱유, 우원재, 저스디스 등 피쳐링 진이 히피는 집시였다의 서늘한 이미지와 다른 어둡고 격정적인 분위기를 선사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첫 트랙부터 마지막까지 힘을 잃지 않고 발휘되는 예측 불가능한 전개가 앨범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한다.

히피는집시였다 인스타그램

 

후추스 <너의 일부>(2019.11.19)

후추스는 오부라더스 출신이자 동명의 밴드에서 보컬과 기타리스트로 활약했던 김정웅의 원맨밴드 프로젝트다. 그리고 이틀 전 그가 갓 발표한 <너의 일부>는 그런 후추스가 5년만에 선보이는 정규앨범이자 원맨밴드 체제 이후 처음 내놓는 정규앨범이다. 아무래도 모처럼 선보이는 정규작업인 만큼 앨범은 뚜렷한 방향성과 분명한 각오, 꼼꼼한 정성으로 가득 차 있다. 밴드 블락스,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등에서 활동하는 김형균이 드럼 세션으로 가세했고, 프롬, 애리, 이선 등 개성 있는 여성 아티스트들이 피쳐링으로, 일레스트레이터 시문이 앨범 아트워크로 힘을 보탰다. 

후추스 ‘감귤농장’

4인조 시절의 앨범 <우리는>을 비롯해 이후 발표한 '등목'(2015), '돌핀'(2016) 등에서 선보인 후추스의 음악 색은 청춘의 푸른 빛으로 비유할 수 있다. 청량한 팝록 사운드와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가사, 나른하지만 동시에 힘 있는 김정웅의 보컬이 이를 대변했다. 이후 '어떤 위로', '밤의 왈츠' 등 밴드 사운드의 비중을 줄이고 댄서블한 무드와 로맨틱한 가사를 앞세우면서는 머뭇거리는 청춘의 이미지를 들려주기도 했다. 이번 앨범 속 후추스의 음악에는 과거 청춘보다 조금 성장한 어른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수록곡에 따라 세련된 편곡의 완연한 팝 사운드가 분위기를 지배하기도 하고, 따스한 어쿠스틱의 감성이 아른거리며 등장하기도 한다. 이전보다 한층 차분하게 가라앉은 후추스의 목소리는 이 앨범 속 노래들의 저음에서나 고음에서 모두 깊고 따스한 울림과 단단한 힘을 들려준다. 코러스 진은 앨범에 밝은 인상과 입체적인 사운드스케이프를 더한다.

후추스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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