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이병헌. 낯익은 이름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그 배우가 아니란다. 감독이란다. 도대체 누구인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이들에게 힌트를 주자면 이병헌 감독은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올해 최고 흥행작 <극한직업>을 만든 감독. 조금 더 부연해 설명하자면, 최근 종영한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바로 그 감독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이 감독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분명한 건 박찬욱 감독이나 봉준호 감독처럼 세계 유명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감독이 아니라는 거.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많은 감독과 달리 이병헌 감독에게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한 이야기만으로 뒤집어지게 웃길 줄 안다는 것. 데뷔 10년. 또렷한 자기만의 색깔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다름 아닌 코미디라는 장르 안에서.

누구나 좋아할 감독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인생 최고의 영화나 드라마를 선사한 감독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군가가 당신일지도 모르니 일단은 한번 뛰어들어보자. 자신이 이병헌 감독 체질인지 아닌지 말이다.

 

<힘내세요, 병헌씨(Cheer up Mr. Lee)>

사람 일은 참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 지금 시점에서 <힘내세요, 병헌씨>를 보고 있노라면 가장 먼저 드는 감상이 그것이다. 영화 속 '병헌' 씨는 흥행은커녕 당장 데뷔도 힘들어 보인다. 간신히 제작사 문턱에 닿은 시나리오는 꼬리를 문 수정을 거듭한 끝에 투자도 못 받고 없던 일이 된다. 단편영화를 찍으며 다시 전의를 불태워보지만, 솔직히 영화 속 병헌 씨의 앞날이 핑크빛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화 밖의 병헌 씨는 어떤가. <힘내세요 병헌 씨>를 만든 지 7년 후, 그는 천만 감독이 되었다. 영화 속 병헌 씨가 영화 밖에서는 진짜로 성공했다는 이 성공스토리는 영화 내용과 별개로 작은 희망 같은 걸 준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 우리에게도 엄청난 행운 같은 게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아느냐고.

이 영화를 만들 당시 이병헌 감독의 사정은 영화 속 병헌 씨와 다를 바가 없었다. 2009년부터 준비하던 상업 영화는 투자가 요원했고, 시간이 남는 김에 이 힘든 상황을 시나리오로 써보자고 해서 나온 것이 바로 이 영화였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제작지원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해 사비까지 털어 넣어 6천만 원을 모았고 그 돈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힘든 시절,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쓴 시나리오였기 때문일까? <힘내세요, 병헌씨>에는 훗날 이병헌 감독 작품의 여러 특징 같은 것들이 날 것의 모습으로 살아있다. 이를테면, 영상 속 상황과 묘하게 엇박을 내며 웃음을 주는 내레이션이나 작품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작품 안에 메타적으로 담기는 것, 한순간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고 주고받는 대사 같은 것들 말이다. 당시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았던 것은 어쩌면 이런 이병헌 감독의 특징은 대중의 사랑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일종의 복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당신이 ‘힘내세요, 병헌씨’를 보고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다면, 이병헌 감독의 다음 작품으로 단계를 넘어가도 좋다. 체질적으로 이병헌 감독과 잘 맞을 확률이 높다는 증거일 테니까.

<힘내세요, 병헌씨> 예고편

 

<냄새는 난다(Smell)>

이병헌 감독의 첫 영화. 제 7회 아시아나 국제 단편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헤어짐을 앞둔 걸로 보이는 젊은 부부가 식사를 하다가 맞닥뜨린 생리현상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힘내세요, 병헌씨>안에 삽입되어 있다. 마치 영화 속 병헌씨가 만드는 바로 그 단편영화인 것처럼 <힘내세요, 병헌씨>가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그 경계를 흐리게 하는 역할을 한다.

<냄새는 난다>는 최근 종영한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이번에는 OST로 그 모습을 바꾸었다. 생리 현상에 대한 노골적인 가사와는 달리 멜로디가 참으로 달콤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멜로가 체질> 13화에서는 생리 현상과 사랑하는 연인 사이의 웃지못할 상황이 <냄새는 난다>에서보다 더 길게 풀려있다. 언뜻보면 이 단편영화에 등장하는 커플의 과거 혹은 미래의 모습이 <멜로가 체질> 13화에 담겨있는건가? 하고 느껴질 정도다.

<멜로가 체질> OST 중 'Smell'

 

<긍정이 체질>

이번엔 무려 웹드라마다. 영화 각본, 각색, 감독만으로 모자라서 웹드라마까지 도전하다니. 심지어 삼성에서 제작한 웹드라마다. 하지만 삼성이라는 대기업의 존재는 <긍정이 체질>에서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 작품은 누가봐도 이병헌 감독의 드라마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메타적으로 담겨 현실과 작품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건 <힘내세요, 병헌씨> 때부터 여전한데다 <멜로가 체질>로 이어지는 '~가 체질'이라는 제목의 형태는 물론 주인공의 이름이 반복된다는 것도 그렇다. <긍정이 체질>에서 배우 도경수가 맡은 주인공의 이름인 '김환동'은 <멜로가 체질>의 주인공 '임진주' 작가의 전남친 '김환동' PD를 떠오르게 한다. 임진주 작가와 김환동 PD의 지난 연애사를 따로 미리 풀어놓았던 게 <긍정이 체질>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거대한 이병헌의 세계 안에 존재하는 평행세계 같은 느낌이랄까. 어쨌든 이병헌 감독표 웹드라마는 흥행에 성공한다. 공개된지 18일만에 무려 누적 조회수 3천만을 기록한 것. 극한직업을 통해 천만감독 달성까지 앞으로 3년. 웹드라마에서도 그 조짐은 이미 드러나고 있었던 거다.

<긍정이 체질> 예고편

 

<멜로가 체질>

최고 시청률이 고작 1.8%. <극한직업>으로 천오백만이 넘는 관객수를 기록하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뒤이어 내놓은 작품치고는 참으로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성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드라마, 다른 1%대 시청률의 드라마들과 어딘가 다르다. 1.8% 드라마 주제에 OST인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거야'는 각종 음원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 보통 시청률 1위 드라마의 OST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음원차트 1위라는 걸 감안했을 때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최근 <조이뉴스24>가 창간 15주년을 맞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올해 최고 드라마 3위에 올랐다. 1위가 상반기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스카이 캐슬>, 2위가 배우 김혜자에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대상을 안겨준 <눈이 부시게>라는 걸 감안하면 믿기 힘든 결과다. 1.8%의 시청률이 이끌어낸 반응이라기엔 그 크기가 작지 않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일까?

<멜로가 체질> OST 중 장범준의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거야'

공감을 자아내는 나레이션과 핑퐁처럼 주고받는 재치있는 대사들, 그리고 그 가운데 다 받아적기도 힘들정도로 넘쳐나는 명대사들, 누구나 경험 했을 법한 생생한 에피소드부터 웃음을 자아내는 아이러니한 상황들까지. 시청률로는 계산할 수 없는 이병헌 감독만의 매력이 16화 내내 펼쳐진다. 작품에서 늘 지적받았던 이병헌 감독 작품 속 여성 캐릭터에 대한 한계도 <멜로가 체질>에서는 '진주'(천우희), '은정'(전여빈), '한주'(한지은)과 같은 캐릭터들을 통해 많이 나아진 면을 보인다.

사실, 시청률은 중요하지 않다. <멜로가 체질>이란 드라마가 당신의 체질에 얼마나 맞는지가 중요할 뿐. 작품 속 명대사를 하나 인용해볼까 한다. "그 마음이 하루 갈지 천년 갈지 그것도 생각하지마. 마음이 천년 갈 준비가 되어있어도 몸이 못 따라주는 게 인간이야." 그렇다. 이 드라마가 나랑 맞을지 안맞을지 생각하지 말자. 일단 도전해보자. 인생드라마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모르고 지나치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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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카피 쓴다는 핑계로 각종 드라마, 영화, 책에 마음을, 시간을 더 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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