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를 모르고 번식해나가는 생물처럼, 도시는 무자비한 에너지로 공간을 만들어내고, 소멸시킨다. 도시에는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의 삶과 이야기가 존재해왔으나, 주류로 올라서지 못한 목소리는 대부분 허공에서 낮게 맴돌다 사라지곤 했다. 그 목소리를 붙잡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예술로 만든 이들이 있다. 이정민, 진시우, 김화용 작가로 구성된 창작집단. ‘옥인콜렉티브’가 바로 그들이다.

옥인콜렉티브 (왼쪽부터 김화용, 진시우, 이정민 작가), 사진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그들의 시작은 종로구 옥인아파트의 강제 철거가 이루어졌던, 2009년이었다. 당시 옥인아파트에 거주하던 김화용 작가를 중심으로 동료 작가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옥인아파트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이곳에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졌다. 

예술가와 주민들은 아파트 옥상에 한데 모여 불꽃놀이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바캉스를 보냈다. 그렇게 진시우, 이정민, 김화용 세 명의 작가가 모인 ‘옥인콜렉티브’가 탄생했다.

옥인콜렉티브 <바깥에서>(2018), 단채널 영상, Full HD, 컬러, 사운드, 24분30초

스프레이로 휘갈겨 쓴 공격적인 빨간색 글자, 무방비로 드러난 철골 구조물, 버석거리며 맨살을 보이는 벗겨진 건물 외벽은 철거가 한창 진행 중인 아파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철거라는 단어 속에는 삶도, 주거도, 사람도 자리할 틈이 없다. 그저 사물을 물리적으로 허물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무신경한 목적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재개발이라는 단순한 명목 아래 도시가 벌이는 합법적인 폭력이었다.

철거를 앞둔 을씨년스럽고 음울한 아파트 옥상에서 그들이 벌인 일은 바로 ‘예술’이었다. SNS를 통해 옥인아파트 프로젝트를 접한 사람들도 알음알음 이곳을 찾았다. 그렇게 옥인아파트는 철거 아파트란 낙인에서 ‘예술가들이 재미있는 일을 꾸미는 곳’. ‘무언가 신기한 일이 벌어지는 곳’이란 공간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비록 곧 무너져 사라질 곳이지만, 그들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여전히 옥인에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이 존재함을 알렸다. 밤하늘에 불꽃을 쏘아 올리고, 크게 노래를 부르고, 보물찾기하는 방식으로서. 이는 철거라는 폭력적인 행위 앞에 한없이 무력해져 버린 거주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행위이기도 했다.

옥인콜렉티브 <바깥에서>(2018), 단채널 영상, Full HD, 컬러, 사운드, 24분30초

옥인콜렉티브의 작업은 옥인아파트 프로젝트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파트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옥인콜렉티브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옥인은 더이상 특수한 장소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옥인은 세 명의 작가가 예술을 대하는 태도,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함축하는 단어가 되었다.

옥인이라는 게 저희한테는 어떤 장소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물을 대하는 태도라든가, 상황에 대한 반응같은 것들. 그런 것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는데. 단순히 어떤 철거와 도시개발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당시에 예술을 하는 사람들, 혹은 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여러 문제의식이 겹쳐서 저희에게 다가왔습니다. (중략) 그러니까 옥인이라는 건 저희에게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그런 단어인 것 같아요. - 옥인콜렉티브 이정민 작가, 2018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인터뷰 영상 중 -

옥인콜렉티브 <회전을 찾아서 또는 그 반대>(2018), 단채널 영상, Full HD, 컬러, 사운드. 31분 45초

방법과 매체는 매번 다르게 변주되었지만, 사회와 개인의 관계, 그 지점에서 발견되는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에 주목했다는 점은 옥인의 작업에 일관성을 부여했다. 가장 큰 장점은 적당한 유머를 곁들여 무거운 주제를 일종의 놀이처럼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시민들에게 기체조를 가르친 재난대비 매뉴얼을 통해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대한 정부와 언론의 안일한 대응에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고(<작전명-까맣고 뜨거운 것을 위하여>(2011)), 스페인 거리의 행인에게 <돈키호테>의 일부를 연기하게 만들어(<돈키호테 델 까레(거리의 돈키호테)>(2012)) 스페인 경제위기에 대한 자국민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한 명의 작가가 아닌 세 명의 작은 집단으로 구성된 ‘콜렉티브’란 특성도 한국 현대미술계가 옥인콜렉티브를 주목한 주요한 지점이었다.

옥인콜렉티브 <작전명-까맣고 뜨거운 것을 위하여>(2011), 사진 출처 - 링크

 

예술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삶

진시우(왼쪽), 이정민(오른쪽) 작가, 사진 출처 - 링크

2009년 결성부터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보에 오르기까지, 옥인은 사회와 집단 간의 이야기를 그들 자신의 언어로 풀어가는 일을 계속했다. 그리고 김화용 작가가 떠나고 이정민, 진시우 작가를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오던 옥인콜렉티브는 2019년 8월을 기점으로 멈췄다. 그들의 죽음과 마지막 편지는 연일 뉴스에 등장했고 미술인 복지, 예술인 사각지대 이슈가 다시금 화두로 떠올랐다. 지난 작업을 돌아보기보다는 부실한 예술계에 대한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이정민, 진시우 작가가 남긴 마지막 편지에는 주변인에게 전하는 사과의 말과 함께 예술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이 담담하게 적혀있다. ‘바보 같겠지만 작가는 작업을 만드는 사람, 예술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삶이라 생각했다.’

’예술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삶.’ 나는 미처 알지 못한다. 그렇게 살아온 삶을 차마 짐작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안다. 죽음에 성급한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이정민, 진시우 작가가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본 태도와 시선을 기억하고, 작업들을 다시 한번 찬찬히 되새겨보는 것. 그들의 눈을 통해 미처 보지 못했던 세상의 일부를 발견하는 것. 그것만이 예술에 모두를 바친 옥인콜렉티브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이자 최선의 애도다.

 

Writer

유지우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