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오버(crossover)는 서로 다른 장르가 경계를 넘나들며 교차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때때로 난해하고 이상한 음악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정해진 미학에 구애받지 않는 크로스오버 뮤지션들의 도전이 있어 국내 음악 신은 더욱더 다양하게 발전해올 수 있었다. 마침 태풍과 함께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뀌는 이때 찾아온 국내 신보를 소개한다. 모두 실험적인 크로스오버 음악이다.

* 발매 최신순

 

재즈 × 힙합

남메아리밴드 '늦은 감은 있지만' (2019.10.6)

남메아리밴드 1집 <남메아리밴드 1집 (Your Blues)>

재즈의 자유분방한 매력은 많은 클래식 연주자들을 유혹한다. 실제로 음악계에서 클래식을 전공하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재즈로 전향한 사례는 그 반대 경우보다 무수히 많다. 재즈 피아니스트 남메아리 역시 그렇다. 원래 클래식을 전공했지만 곧 재즈로 방향을 선회했고, 유학 생활 중 무려 퀸시 존스의 초대로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무대를 밟았다. 2013년에 밴드 오마쥬의 멤버로 국내에 데뷔했고, 2016년에는 솔로 앨범 <Echo>를, 올해 가을에는 자기 이름을 앞세운 밴드로 정규앨범을 내놓으며 새로운 출발을 알렸다.

남메아리 '늦은 감은 있지만' 라이브 영상

숄더 키보드를 메고 훵크(funk) 그루브를 밀고 당기는 그의 연주를 듣다 보면 경직된 느낌은 단 한 순간도 받을 수 없다. 이번 앨범 타이틀 '늦은 감은 있지만'도 한 곡 안에서 다양한 반전을 들려주며 자유분방한 크로스오버의 매력을 십분 발휘한다. 인트로의 신시사이저 사운드가 멜로디를 주도할 때 곡은 경쾌한 시티팝 싱글 같고, 중반부 리얼 건반 사운드로 솔로를 선보일 때는 완연한 재즈 같다. 신시사이저가 배경음이 되고, 베이스와 드럼 비트가 앞장설 땐 가사를 얹기 직전의 힙합 비트를 듣고 있는 기분이다. 실제로 남메아리는 앞서 래퍼 슬릭과 합동 무대를 펼친 적도 있다.

슬릭 × 남메아리 '늦은 감은 있지만' 합동 라이브 영상

남메아리 밴드 인스타그램

 

국악 × 월드뮤직

블랙스트링 'Sureña' (2019.10.1)

블랙스트링 2집 <Karma>

국악 연주자들로 구성된 팀 블랙스트링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가장 잘 실천하는 이들이다. 실제로 2016년 발표한 1집 <Black Mask>로 제14회 한국대중음악상 재즈&크로스오버 부문 최우수 연주상을 받은 데 이어 같은 앨범으로 영국 송라인즈 뮤직 어워드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얼마 전 발표한 새 앨범 역시 날카롭고 무거운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와 처연한 국악기 소리, 중동음악 모티프와 블루스 음계, 범패 선율과 민요 구음 등 다양한 어법을 오가며 블랙스트링만의 색깔을 선보인다.

블랙스트링 'Sureña' MV

뮤직비디오로 공개한 'Sureña'는 블랙스트링이 2017년 라틴 아메리카 투어를 앞두고 만든 곡이다. 라틴 아메리카 민속음악의 하나인 'Sureña'에서 영감을 받아 그곳의 풍경을 그린 곡인 만큼 곡 전반에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장구 장단에 맞춰 거문고에서 대금으로 독주가 옮겨가는 과정까지 국악적 면모를 유지하던 곡의 정취는, 대금에서 일렉트릭 기타로 주도권이 옮겨가는 순간 전혀 다른 풍광으로 변화한다. 차분하게 출발해 점차 속도와 열기를 더하는 신비로운 선율과 독특한 리듬에 집중하다 보면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에 '취하는' 기분이 든다.

블랙스트링 페이스북

 

록 ×국악

동양고주파 '파도' (2019.9.30)

동양고주파 1집 <곡면>

동양고주파는 착실히 성장 중이다. 2017년, 인디 신의 거물 밴드 ‘단편선과 선원들’ 해체 후 새로운 음악적 동지를 찾던 최우영(베이스)과 장도혁(퍼커션)은 2015년 전주세계소리축제 소리프론티어 1위 출신의 국악기 양금 연주자 윤은화를 영입해 크로스오버 팀을 꾸렸다. 베이스와 퍼커션의 낮고 탄탄한 리듬 위에 높고 영롱한 소리를 빠르게 연타하는 양금의 멜로디가 만들어내는 이들의 강렬한 매력은 지난해 발매한 EP <틈>으로 먼저 우리에게 소개된 바 있다. (링크)

동양고주파 '틈'(2018)

양금은 대중에게 다소 생소한 악기다. 그러나 현을 빠르게 두드리는 '타현'을 통해 얇고 투명한 소리를 내면서도 빠르고 역동적인 연주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최근 포스트록 신에서 그 가치가 재발견되고 있는 악기이기도 하다. 베이스와 드럼의 들끓는 인트로로 출발해 양금의 높은음이 화려한 연주를 수놓는 '틈'이 대표적인 예시다. 아직 공식 영상은 나오지 않았지만 9월 30일 발매한 새 앨범의 '파도'도 함께 주목해보자. 반복적으로 연주되는 양금의 동양풍 리프와 나머지 악기들의 묵직한 그루브가 합쳐져 거친 바다 위 거대한 파도를 연상하게 한다.

동양고주파 페이스북

 

재즈 × 국악

경기남부재즈 'Be Gut' (2019.9.24)

경기남부재즈 2집 <Be Good>

경기남부재즈는 보컬, 드럼, 베이스, 기타의 전형적인 구성 재즈 쿼텟이다. 그러나 다소 독특한 콘셉트를 표방하고 있다. 마치 전통음악처럼 '경기 남부'라는 지역색과 소리와 악기 이수자라는 전승 개념을 앞세우고 있는 것. 그저 겉으로만 전통음악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우리 음악의 구성지고 토속적인 요소들을 곡에 적절히 녹여내고 있다. 자유분방한 재즈 그루브 위로 보컬 임태웅이 재즈와 블루스, 민요와 한국적 발라드를 넘나들며 소리를 얹는 것이 특징이다.

경기남부재즈 '바람의 아들' 라이브 영상

임태웅은 재즈와 국악, 다양한 즉흥 퍼포먼스를 자신의 예술 토양으로 삼는 종합예술인이다. 그는 지난 1집 <한량>(2018)부터 이번 2집 <Be Good>에 이르기까지 전곡 작사, 작곡을 맡아 재즈든, 국악이든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자신의 영감을 선보인다. “무당은 영매로 작업하고 예술가는 영감으로 작업한다.”는 이번 앨범의 소개글에서 그의 작가적 정신과 자신감을 읽을 수 있다. 동양고주파와 마찬가지로 아직 공식 영상은 없지만, 앨범 타이틀 'Be Gut'을 놓치지 말고 들어보자. 폭풍전야처럼 잔잔한 불안감을 펼치는 재즈 그루브 위로 국악의 구음과 재즈의 스캣 사이 짙은 개성의 감각을 뽐내는 임태웅의 소리를 확인할 수 있다.

경기남부재즈 페이스북

 

음악 × 소음

김병덕 'Time Sketches' (2019.8.29)

김병덕 5집 <After Long Silence>

1990년대 실험음악 신 최전선에서 한창 활약하며 4장의 앨범을 발매한 김병덕. 4집 <New Trilogy>(1995) 이후 무려 24년만에 새 앨범을 내놓은 그의 음악은 뭐라 장르를 형언하기 어렵다. 재즈와 현대 대중음악을 뿌리에 두었다고 하지만, 그의 음악은 실험적인 현대음악이나 앰비언트에 가까워 보일 때가 많다. 자기 스스로는 국악기, 기타, 신시사이저를 다루는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라고 소개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밤무대에 오르며 접한 음악은 당대 팝, 록부터 국악, 재즈, 현대음악 등 다양하며, 37년째 먹통레코드를 운영 중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신작을 내지 않던 그가 세상에 나오게 된 건 뜻밖의 기회를 통해서였다. 김병덕의 지난 앨범 <Experiment No. 2>(1992)를 우연히 구매한 프랑스인 커티스(Curtis)의 재발굴과 도움으로 지난해 베스트 앨범 <Experiment No. X>를 세계에 발표하게 된 것. 뒤늦은 세상의 관심을 유심히 지켜본 그는 곧장 신작 작업에 착수해 새 앨범을 발표하게 되었다.

김병덕 'Time Sketches'

5집 <After Long Silence>(긴 침묵 뒤에)는 그 제목처럼 그간 쌓아둔 깊은 울림을 쏟아내고 있다. 오프닝곡이자 타이틀인 'Awakening'의 무려 14분이라는 러닝타임 끝에 깨어난 그는 네 곡에 걸쳐 일렉트릭 기타의 울림이 만들어내는 명상 효과를 선보이기도 하고, 징과 꽹과리로 앰비언트에 무속음악이 결합된 'Shaman Dance'를 들려주기도 한다. 'Time Sketches'는 더욱더 구체적이다. 전화 다이얼 소리로 문을 열어 자동차, 가축, 시장, 뉴스의 소음에 일렉트릭 기타 연주, 재즈 피아노, 클래식 첼로를 조화롭게 버무렸다. 극단적으로 음악의 비기능적 측면에 집중해 난해한 소리 조합을 선보였던 전자음악 초창기 뮤지끄 콘크리트(musique concrete)를 연상시키게도 하지만 음악의 재미를 놓치지 않고 있기도 하다.

먹통레코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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