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에 자켓을 걸치고 한 손엔 비닐봉지를 든 노인이 이리저리 광장을 거닌다. 초면임에도 노인은 스스럼없이 젊은이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사진가 마틴 어스본은 스튜디오에서 광장을 내려보던 중, 그 모습에 눈길이 갔다. 2007년 여름의 일이다.

처음엔 정신이 온전치 않거나 홈리스일거라 생각했다. 공모전을 위한 특별한 기회라고 생각한 어스본은 카메라를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간다. 노인의 정신은 너무나 멀쩡했고 누구보다 이스트런던의 많은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매우 호기심 넘치고 친절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마틴 어스본

그의 이름은 조지프 마코비치. 1927년 1월 1일에 태어나 어머니와 해변을 다녀온 일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이스트 런던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는 토박이 중의 토박이였다. 두 사람은 광장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 동네에서 여러 번 마주치며 친구가 된다.

Ⓒ마틴 어스본, 가운데 아래에 서있는 조지프 마코비치의 모습

“나는 영국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섬이랑 정글이랑 나무랑 동물이랑 물고기랑 엘크랑 산을 직접 보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이스트런던에서 평생 살아왔고, 이곳이 내 집이에요. 어머니와 해변에 한번 가본 적은 있어요. 내가 어렸을 때는 모두가 코크니(런던의 노동계급 사람들)였지요. 늘 비슷비슷한 얼굴들만 마주치는 것 같았어요. 이제는 모두 섞여 있네요. 나는 그게 좋아요….” – <집> 중에서

길에서 시작한 촬영은 자연스레 마코비치의 집으로 이어졌다. 그는 우연히 알게 된 젊은 사진가를 선뜻 집으로 초대하고서도 카메라는 의식하지 않은 채 자신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마틴 어스본

“…부비강이 안 좋아져서 해크니 로드로 가서 짐가방에 리벳을 박았지요. 20년 동안 그 일을 했어요. 십장이 나쁜 놈이었는데, 그것만 아니면 괜찮았어요. 그래도 내가 똑똑했다면, 아주 똑똑했다면, 회계사가 됐을 거예요. 정말 좋은 직업이니까요. 그리고 내가 더 가벼웠다면… 그러면 뭐가 되고 싶었는지 알아요? 발레 무용수가 되고 싶었겠지요. 그게 내 꿈이 되었을 거예요.” - <일> 중에서

굴뚝 청소부를 하다가 시장이 된 브룩스 씨가 어떻게 되었는지, 왜 걷는 것을 좋아하는지, 어렸을 때 가족들과 갔던 시장에서 욕을 하는 앵무새가 있었던 이야기 등, 산업 황무지였던 옛 런던을 오늘날까지 모두 지켜보며 어느 곳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설명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틴 어스본

평생 동네를 떠나본 적이 없다고 했지만 그의 이야기보따리는 매우 넓고 다채로운 세계를 그리고 있었다. 세월을 읊는 일보다 엉뚱한 곳으로 튀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그 또한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이었기에 현재의 관심사들이 튀어나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스본은 이 시간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두사람이 보여준 우정과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어 독립출판물의 평균 추이를 뛰어넘는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이를 시작으로 마틴 어스본은 출판사를 차렸다.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타날 만큼 마코비치의 일상은 분명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와 다르지 않았던 그의 시간은 단지 먼저 흘러갔을 뿐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스트런던을 진정으로 목격 한 사람 중 하나이자 개개인의 생으로 골목과 동네를 채워온 주역들 중 한 명이었지만, 그 역시 누군가 놓아둔 징검다리를 건너간 사람이기도 했다.

Ⓒ마틴 어스본

가끔 우리는 착각을 하곤 한다. 마치 이 세상의 주인은 나의 세대가 유일한 것처럼. 언젠가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그날을 알면서도 우리는 또 잊고, 먼저 머물렀던 이들의 모습을 너무나도 쉽게 지운다. 그래서 겹겹이 쌓여간 주름 사이의 맑은 눈을 쉽게 발견하지 못한다. 온전히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에서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을 그 눈을 알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우연한 시작이었지만 어스본은 마코비치를 만났다. 덕분에 우리보다 조금 더 앞에 있던 세월의 길을 더듬어보고, 옷매무새를 고치듯 무겁지 않게 다시 삶을 대하는 태도를 다듬어 볼 수 있다.

고요하고 건강하게, 덤덤하고 밝게 살아온 그의 흔적들은 언젠가 맞이할 우리의 끝을 다시금 바라보게 해주는 동시에 삶의 초점을 현재로 돌려준다.

“세상일에 울어봤자 소용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슬퍼해도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아요. 가장 좋은 건 그냥 계속 걷는 겁니다.” - <슬픔> 중에서

Ⓒ마틴 어스본
Ⓒ마틴 어스본, <나는 이스트런던에서 86½년을 살았다>, 출처 - 출판사 클

 

Writer

그림으로 숨 쉬고 맛있는 음악을 찾아 먹는 디자이너입니다. 작품보다 액자, 메인보다 B컷, 본편보다는 메이킹 필름에 열광합니다. 환호 섞인 풍경을 좋아해 항상 공연장 마지막 열에 서며, 동경하는 것들에게서 받는 주체 못 할 무언가를 환기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