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들어진 바위산 아래로 자리한 푸른 기와집과 한적한 동네. 서촌 누하동은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곳이다. 그 속에 자리한 ‘무목적’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서촌의 숨은 아지트. 멋스럽지만 소란스럽지 않은, 흥미롭지만 지나치지 않은 ‘무목적(無目的)’ 빌딩을 소개한다.

뭐든지 빨리 뜨고 지는 서울에서 흥한다는 동네는 수도 없이 많다. 뜬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미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몸살을 앓고 있단다. 서촌 누하동은 수수하고 꾸밈없는 동네다. 조금만 떨어져도 한복을 입은 관광객들이 북적이지만, 무목적이 자리한 언덕배기는 외따로 떨어진 조용한 섬 같은 느낌을 준다. 꾸며진 빈티지가 아닌 삶의 흔적이 머무는 곳. 오래된 건물과 원주민들, 그곳에 자연스럽게 섞여든 콘크리트 건물. 무목적은 이곳만의 콘텐츠를 담고 싶다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완성도와 희소성을 가진 공간들

꾸밈없이 심플한 건물 외관에 어울리는 이름 ‘무목적’.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자연스레 모여든 사람들이 미로 같은 공간에서 물 흐르듯이 배회하게 된다는 뜻이 가장 적합해 보인다. 건물은 두 동으로 나뉘어 있는데 오른편 지하와 1층에는 편집숍 ‘팀블룸’, 2층에는 사진 스튜디오 ‘심도’, 3층은 컨템퍼러리 전시 공간 ‘무목적’, 4층은 카페 ‘대충유원지’와 인왕산이 보이는 루프탑이 있다. 왼편 2, 3층에는 디자인세품숍 ‘미뗌바우하우스’가 위치한다.

입점 기준은 완성도와 희소성. 다른 곳이 아닌 무목적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콘텐츠가 담기길 바랐다고 한다. 건물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 공간을 이끄는 곳도 있지만, 무목적은 자신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 높은 기준으로 입점사를 선정하고, 그들이 돋보이는 것을 가장 큰 가치로 삼는다. 그래서인지 무목적과 입점 브랜드 모두 고유한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조화롭다.

 

순환과 변화를 위한 전시 공간

전시 공간은 무목적의 색을 가장 잘 나타내는 곳이다. 전통 갤러리가 아닌 컨템퍼러리 전시 공간으로 다양한 작가의 작업을 만나볼 수 있다. 파인다이닝, LP샵 등 여러 선택지가 있었지만 손정민 작가의 전시를 시작으로 전시공간이 되었다. 고정된 공간에서 유일하게 계속 변화하는 생동감이 넘치는 곳으로, 작가와 전시의 성격에 따라 공간의 분위기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변한다. 미디어 아티스트인 송호준 작가의 전시 때는 싱어송라이터이자 DJ로 활동하는 뮤지션 전용현의 음악과 함께하는 오프닝 파티가 있었다.

출처 - 무목적 인스타그램

최근에는 그래피티 작가 SPIV(스피브)를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의 크리에이티브 팀이 함께하는 전시가 열렸다. 디자인을 중심으로 특별한 프로젝트를 구상하는 ‘귀뚜라미’가 기획하고, 브랜드 세션스(Sessions), 한남동의 빈티지 포스터숍 썸띵엘스(Something Else)가 참여했다. 비밥 댄스가 함께한 오프닝은 스트릿 문화를 나타내는 전시와 합쳐져 한층 더 탄탄한 스토리를 만들었다. 순수 예술에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시도가 돋보이는 전시공간은 날마다 색을 달리하는 무목적의 이야기를 전한다.

출처 - 무목적 인스타그램

 

닫혀있지만 열린 곳

노출 콘크리트 벽면 때문에 자칫 러프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목적 건물 곳곳에 디테일과 엣지가 숨어 있다. 작은 정원의 조경, 천장이 뚫린 독특한 야외공간, 사이니지, 용접까지 대충 넘어간 곳이 없다. 건물의 벽면은 사람이 직접 고압 살수장치로 물을 쏘아 부시는 ‘치핑(Chipping)’ 공법을 사용했다. 덕분에 개성 있는 상처를 가진 건물이 되었고, 돌산과 어우러져 더욱 그 느낌이 산다.

접근성이 높은 1층에 유동인구가 많은 카페를 배치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무목적은 오히려 그 반대다. 조용한 동네 분위기에 걸맞게 아래는 정적이고, 위로 갈수록 생동감을 더해 아지트 같은 느낌을 준다. 이어졌다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는 복잡한 구조도 한몫하는데, 미로 같은 구조는 공간 자체가 무목적인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 매력적인 건물은 2019년 제37회 서울시건축상 최우수상에 선정되며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문화비축기지, 서소문역사공원 및 박물관, 아모레퍼시픽 본사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는데, 무목적은 다른 수상 건물에 비해 규모가 작다. 작지만 독특한 건물구조로 오랫동안 머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신기한 공간이다. 전면도로와 후면 골목을 연결하여 없던 길을 만들기도 했는데, 길을 처음 사용한 것은 지난해 ‘영화루’ 화재 때 불을 끈 소방관들이었다. 실제로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공공성까지 지닌 공간. 그것이 무목적이 닫혀있지만 열려있는 느낌을 주는 이유다. 무목적은 그렇게 서촌의 콘텍스트를 담았다.

 

무목적의 목적

각 브랜드의 성공적인 안착으로 완전한 모습을 갖춘 무목적은 다양한 콜라보를 통해 한발 더 나아갈 예정이다. 특색이 뚜렷한 브랜드들이 공존하는 만큼 발전 여지는 무궁무진하다. 전시 공간을 이용한 다양한 기획과 입점 브랜드 간의 협업을 통해 무목적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콘텐츠를 준비하고 있다.

공간을 완성하는 것은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무목적이 다채로운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감성을 나누는 소중한 아지트가 되었으면 한다. 아끼는 가방처럼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물건이 있듯, 들리기만 해도 기분 좋은 공간이길. 무목적이 준비한 이야기를 통해 이곳을 찾은 모든 이가 감성이 충만해지는 기쁨을 누리길. 이상이 무목적의 목적이다.

 

팀블룸(Timbloom)

출처 - 팀블룸 인스타그램

독보적인 콘텐츠를 자랑하는 편집숍. 세계 각지의 재능있는 디자이너의 핸드메이드 제품과 팀블룸의 감성을 담은 오브제를 판매한다. 팀블룸이 아니라면 해외로 떠나야지만 만나볼 수 있는 제품이 가득해 희소성이 확실하다.

 

심도

출처 - 심도 인스타그램

선과 본질에 집중하는 흑백사진 스튜디오. 아날로그 한 흑백사진이 아닌, 본질에 집중한 현대적인 흑백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디자이너 협업으로 탄생한 공간은 심도의 사진처럼 미니멀한 울림을 준다. 매주 금요일마다 운영하는 오픈 스튜디오에서는 일회용 흑백 필름카메라 등 심도의 아이덴티티가 담긴 굿즈를 만나볼 수 있다. 사진, 영상, 디자인을 주제로 한 소규모 강연도 열려 다양한 시도가 돋보인다.

 

인왕산 대충유원지

출처 - 대충유원지 인스타그램

카페 대충유원지가 연남동에 이어 무목적에 두 번째 보금자리를 틀었다. 조선 시대 호랑이를 뜻하는 ‘대충(大蟲)’이라는 의미와 펼쳐진 인왕산이 더없이 잘 어울린다. 여러 디자이너의 손길이 닿아 감각이 넘치는 공간. 맛있는 차와 아름다운 경치가 마음을 녹인다.

 

미뗌바우하우스

출처 - 미뗌바우하우스 인스타그램

바우하우스 오리지널 디자인을 선보이는 독일의 Tecnoline 과 Tecnolumen의 공식 수입 업체로, 바우하우스 디자인의 문손잡이, 조명을 선보인다. Tecnoline의 도어 핸들은 한국에서는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다. 제품 하나하나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 꼭 바우하우스 박물관에 와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바우하우스 탄생 100주년으로 관심이 뜨거운 지금 방문하기 적격인 곳.

 

무목적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대로 46 무목적 3층
전화 02-792-9075

무목적 인스타그램

 

Writer

김혜인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