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 좀처럼 찾기 힘든 영화 속 인물들의 강렬한 머리색은 캐릭터의 개성과 운명,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멋진 장치다. 파란색은 영어로 ‘우울하다(blue)’는 뜻을 담고 있지만, 막상 영화에서 머리색으로 쓰인 블루는 꽤 다양한 의미와 상징을 품고 있다. 파란색 머리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모아보고,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들을 생각해봤다.

 

1. 무정과 폐허의 블루

<이터널 선샤인>(2004)에서 주인공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의 실제 머리색은 유년 시절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덕분에 클레멘타인의 머리색은 주인공 ‘조엘(짐 캐리)’이 지난 기억과 현실을 오감에 따라 뒤섞인 서사의 시점을 가늠하는 장치가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아무렇게나 정해진 것이 아닌 조엘에 대한 클레멘타인의 마음과 두 사람의 관계를 가늠하게 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관객이 영화에서 처음 마주하는 클레멘타인의 머리색이 바로 파란색이다. 두 사람은 이 장면에서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들처럼 행동하지만, 두 사람은 사실 기억을 지웠을 뿐 과거 연인 사이였다. 줄거리상 조엘을 처음 만났을 당시, ‘그린 레볼루션(Green Revolution)’을 띄고 있던 클레멘타인의 머리는, 두 사람의 관계가 무르익음에 따라 빨간색, 노란색, 주황색으로 변했다가, 결국 가슴 아픈 이별 후 클레멘타인이 조엘의 기억을 지움에 따라 파란색이 된다.

마치 나뭇잎의 색에 따라 변화하는 계절을 묘사하는 것처럼, 클레멘타인의 머리색은 여름의 짙은 녹음으로부터 출발해, 붉은 단풍과 주황빛 낙엽을 거쳐 차가운 겨울 바다의 색에 도달한다. 기억을 지운 상태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마치 서로를 전에 본 것과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클레멘타인은 말한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바뀐 머리색 때문일 거라고. 그는 지금 자신의 머리색이 ‘블루 루인(Blue Ruin)’이라고 덧붙인다.

 

2. 자유로운 갈망과 애정의 블루

반대로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 속 ‘엠마’(레아 세이두)의 파란색 머리는 프랑스 삼색기의 그것처럼 긍정적 의미의 ‘자유’를 내포한다. <이터널 선샤인>과 마찬가지로 작중 ‘아델’(아델 에그자르코폴로스)은 첫 만남부터 엠마의 머리색에 홀린 듯 시선이 사로잡힌다. 물론 아델이 사랑에 빠지는 건 엠마의 머리가 아닌 그의 열정적이고 자유분방한 태도를 통해서다. 엠마는 마치 몸에 밴 듯 자유로운 삶과 연애를 갈망하고, 평범한 삶을 살려는 아델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의 마음에도 열정이 식는다. 엠마의 관심이 아델을 떠나 자신의 예술과 다른 사람을 향함에 따라, 두 사람의 관계가 이 수평적이고 쌍방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상호 엇갈리고 수직적으로 됨에 따라, 엠마 머리의 파란색은 점차 선명함을 잃어간다.

“내가 살아남으려고 누군가를 붙들면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게 될 것만 같아. 제자리걸음은 하기 싫거든.”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2010)는 주인공 ‘스콧 필그림’(마이클 세라)이 새 여자친구 ‘라모나 플라워스’(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테드)와 사귀기 위해 일곱 명의 사악한 전 남자친구들과 사투를 벌인다는 내용의 이야기다. 만화를 원작으로 한 엉뚱한 줄거리만큼이나 파란 머리의 라모나 역시 독특한 캐릭터인데 미국 뉴욕에서 살다가 아마존 배달을 위해 캐나다 토론토로 이사 왔다는 설정이나 남들보다 늘 한발 앞서서 변해야 한다는 강박적으로 자유분방한 성격 등이 대표적이다. 그 때문인지 라모나는 늘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다가도, 아무런 전조나 통보도 없이 연인들을 떠나왔다. 그러나 스콧을 만나고 그의 설득에 따라 타인과 함께 변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3. 광기와 뒤틀린 애정의 블루

<숲속으로>(2014)는 동화판 ‘어벤져스’라고 할 수 있는 영화다. 이 작품에서 그림 형제의 동화인 <신데렐라>, <빨간 두건>, <라푼젤>과 영국 민담 <잭과 콩나무> 속 캐릭터들이 한 가지 이야기로 맞물리기 때문. 이 중에서도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새파란 머리의 마녀다. 그는 제빵사의 아버지에게 원한을 가져 제빵사의 딸을 빼앗고, 아들이 아이를 못 낳게 하는 저주를 내렸다. 그렇다고 마녀가 마냥 악인인 것은 아니다. 마녀는 비록 비뚤어진 애정이지만 데려온 제빵사의 딸인 '라푼젤'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가 비뚤어지게 된 계기도 제빵사의 아버지가 마법의 콩을 훔쳐 마녀가 한순간에 늙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요 인물은 아니지만, 새파란 머리색과 타인을 향한 뒤틀린 애정을 보이는 인물로 <헝거 게임> 시리즈 속 ‘시저 플리크맨’(스탠리 투치)을 빼놓을 수 없다. 모든 부와 권력이 집중된 수도 ‘캐피톨’의 지배 아래 이를 둘러싼 12개 구역에 대한 통제 명목으로 매년 각 구역에서 10대 소년소녀 1명씩을 뽑아 서로 죽고 죽이게 하는 헝거게임을 펼치는 잔인한 사회. 이러한 시스템 아래 제74회 우승자가 된 주인공 ‘캣니스’(제니퍼 로렌스)는 열두 구역의 혁명에 불을 지피는 도화선이 되고, 헝거게임의 간판이자 호스트로서 게임 전야의 인터뷰를 담당했던 시저 플리크맨은, 자신이 아꼈던 캣니스의 배신에 아쉬움을 표한다. 물론 그는 정치가나 권력자가 아닌 그저 사회자였기에 헝거게임에 관한 직접적인 책임이 없었지만, 주인공들을 향한 진심 어린 애정과 응원이 아닌, 마치 광인처럼 자기만의 애정과 악어의 눈물을 보이는 그의 모습에 얄미운 감정을 느낀 관객이 한둘이 아니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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