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실제 주인공 알마시

1996년 아카데미상을 휩쓴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대단한 영화였다. 2억 3천만 달러의 박스오피스 성공과 함께, 아카데미상 12개 부문에 후보에 올라 무려 9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최고 영예인 오스카 작품상과 함께 2008년에 생을 마감한 안소니 밍겔라 감독은 감독상을 받았다. 1992년에 발간된 마이클 온다체(Michael Ondaatje)의 동명의 부커상 수상 소설을 바탕으로 하여, 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비행기 사고로 심한 화상을 입고 죽어가는 환자가 과거를 회상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랄프 파인즈가 연기한 그의 이름은 '래슬로 알마시(Laszlo Almasy)' 백작, 1930년대 화두였던 아프리카 사막 탐험으로 유명한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하였다.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1996) 예고편

작가는 알마시 백작의 파란만장한 개인사를 듣고, 그의 행적을 모티브로 하여 자신의 허구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출신인 알마시는 영국에서 교육을 받은 후 1차대전에 참여하였고, 자동차 회사 세일즈와 비행기 조종사 등 선구적인 일을 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자동차 홍보와 관련하여 1926년 이집트에서 수단까지 나일강을 따라 자동차로 여행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그는 카이로에 머물던 유럽인들로 구성된 탐험 클럽을 결성하여, 여러 차례 나일강 서쪽을 탐험하여 전설상의 오아시스 Zerzura과 헝가리 후손으로 알려진 Magyarab 부족을 찾았다. <잉글리시 페이션트>에 등장하는 동굴 속의 다이버 벽화(The Cave of Swimmers)를 발견한 시기는 1932년, 길프 케비르(Gilf Kebir) 고원을 탐험할 때다.

길프 케비르 고원 지역의 선사시대 벽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 콜린 퍼스가 연기한 저프리 클리프톤은, 1932년 탐험을 함께 했던 실존 인물 로버트 클레이톤 경(Sir Robert Clayton)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그는 영화에 묘사된 것처럼 아내의 외도에 분노하여 자살에 가까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 탐험에서 돌아온 후 급성 감염 증세로 두 달 만에 사망했다. 그의 부인 도로시(Dorothy) 역시 비행기 파일럿이었는데, 그로부터 7년 후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작가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알마시 백작이 클레이톤 부부와 아프리카 탐험을 하던 중 부인이 헤로도투스 일화를 낭송한 것을 계기로 사랑이 싹트게 되고, 두 사람의 불륜을 알게 된 클레이톤이 비행기 사고를 일으키는 것으로 허구적인 관계를 구성한다.

로버트 클레이톤 경과 그의 아내 도로시

영국 정보부는 MI6는 알마시 백작이 이탈리아의 스파이가 아닐까 의심했고, 이탈리아 정보부는 그 반대로 생각했다. 2차대전 중 헝가리에 머물던 알마시는 영국을 위해 간첩 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나 극적으로 탈출한다. 당시 영국 정보부가 그의 탈출을 도왔고, 그 후에는 소련 정보부가 그를 살해하려고 했다는 미확인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집트와 이태리를 떠돌던 그는, 1951년 고향 오스트리아 방문하던 도중에 이질에 걸려 살즈부르그의 한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여 그 병원 뒤뜰에 묻혔다. 그가 사망한 지 40여년 만에 부커상 수상 소설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그의 행적이 세간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헝가리 항공 클럽에서 찾아와 한동안 잊혔던 그의 묘비석에 '파일럿, 사하라 탐험가, Zerzura Oasis의 발견자'라고 새겼다.

아프리카 사막 탐험 당시 알마시(가운데)

그의 복잡다단한 실제 인생은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와는 아주 다르다는 것이 최근에서야 대중에게 밝혀졌다. 영국 정보부의 문서에 의해 그가 아프리카 대륙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려던 유럽 정보부들의 이중 첩자로 활동했으며, 동성연애자였다는 의혹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행적을 조사한 르뽀 작가 John Bierman의 저서 <The Secret Life of Laszlo Almasy: The Real English Patient>(2004)에서 세세하게 드러나 있다.

<The Secret Life of Laszlo Almasy> 표지

그가 사망한 지 59년 만인 2010년에는 알마시가 독일어로 직접 쓴 연애편지가 발견되었다. 후일 지뢰 사고로 사망한 Hans Entholt 라는 젊은 독일 병사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 따르면, 그는 명백한 동성연애자였던 것이다. 이 편지를 발견하여 독일의 <스피겔>지에 제보한 아프리카 연구 기관에 따르면, 알마시의 아프리카 탐험을 후원했던 이집트 왕자들 역시 그와 염문 관계였다는 것이다. 1930년대 당시 신비의 도시 카이로를 배경으로 유럽의 사막 탐험가들의 위험한 로맨스를 그린 영화의 실제 인물들은 영화에서 묘사된 것과는 아주 달랐다는 것이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1841년부터 카이로의 명소로 자리잡은 Shepheard’s Hotel Jazz Orchestra의 ‘Where or When’이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에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