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터데이>(2019)는 비틀스가 사라진다는 상상에서 시작된다. 흥미로운 설정을 잘 꾸려나갈 수 있을까 걱정하던 찰나에, 감독이 누군지 보니 '대니 보일'이다. 대니 보일은 전 세계인들이 챙겨 본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의 감독이자, 그 어떤 장르도 자신의 스타일로 풀어내는 영화감독이다. 

온몸의 감각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연출을 보여주는 대니 보일의 영화 속 인물들은 주로 막다른 길에 서 있다. 돈 가방 때문에 우정이 깨질 위기이고, 약물중독으로 허우적거리고, 퀴즈쇼에서 우승했음에도 사기죄로 의심받고, 등반 중 바위에 팔이 짓눌려 고립된다. 위기에 처한 인물들의 날 선 감각이 관객에게 고스란히 느껴지는, 대니 보일 감독의 작품들을 살펴보자.

대니 보일 감독, 출처 - imdb

 

<쉘로우 그레이브>

의사 '줄리엣'(케리 폭스), 회계사 '데이비드'(크리스토퍼 에클리스턴), 기자 '알렉스'(이완 맥그리거),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세 사람은 함께 살고 있다. 셋은 함께 살 룸메이트를 한 명 더 구하기로 하고, 까다로운 그들의 성향에 딱 맞는 룸메이트를 발견한다. 새로운 룸메이트를 맞이한 다음 날 아침, 그는 죽었고 그의 옆에는 거액의 돈 가방이 있다. 셋은 갈등하다가 시체를 유기하고 돈을 갖기로 한다.

<쉘로우 그레이브>(1994)는 대니 보일 감독의 데뷔작이다. 대니 보일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이완 맥그리거와 처음 만난 작품으로, 이후에도 연달아서 <트레인스포팅>(1996), <인질>(1997)에서 호흡을 맞춘다. 제목은 '얕은 무덤'을 뜻하는데, 이는 <쉘로우 그레이브> 속 인물들이 시체를 묻는 방식이자 세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은유로 보인다.

<쉘로우 그레이브> 트레일러 

만약 새로운 룸메이트를 구하지 않았다면, 그가 갑자기 죽지 않았다면, 돈 가방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들의 관계는 변함없었을까? 예상 못 한 사건 때문에 부서진 관계 앞에서 우리는 갑작스러운 우연을 원망한다. 누군가는 관계의 단단함을 시험하기 위해서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미 균열로 가득해서,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관계에 아주 작은 파동이 일어난 게 아닐까? 죽음이나 돈 가방이 아니라 작은 말다툼에도 이미 무너질 관계가 아니었을까? 삶이 슬픈 건 ‘만약’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수많은 상상 때문일지도 모른다.

 

<트레인스포팅>

마크 '랜턴'(이완 맥그리거)은 친구 '스퍼드'(이완 브렘너), '식보이'(조니 리 밀러)와 함께 마약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들 주변에는 마약은 안 하지만 폭력에 중독된 '벡비'(로버트 칼라일), 마약에 관심 없이 여자친구와 잘 지내고 있는 '토미'(케빈 맥키드) 등이 있다. 랜턴은 마약을 끊기로 마음먹지만 쉽지 않고, 랜턴과 친구들은 절도를 비롯한 구제 불능으로 보일 만한 짓들만 골라서 한다.

<트레인스포팅>(1996)은 어반 웰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으로, 대니 보일의 작품 중 가장 많은 마니아를 거느린 영화다. 대니 보일이 유일하게 후속작을 연출한 작품으로, 후속작 <T2: 트레인스포팅 2>(2017)에도 전편의 주요 인물들이 대부분 그대로 등장한다. <트레인스포팅>은 개봉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방황하는 청춘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 중 하나다.

<트레인스포팅> 트레일러 

랜턴은 마약을 끊기로 마음먹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약을 끊기 위한 최후의 준비물은 마지막으로 즐길 마약이다. 이를 위해서 좌약형 마약을 찾아서 변기통으로 들어가는 등 난리를 쳐봐도, 마약에 대한 유혹은 끝이 없다. 정착 좀 하고 살려고 하면 안하무인인 친구들이 찾아오는 등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랜턴의 삶은 가치 있다. 랜턴은 기성세대가 제시한 기준은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으니까. 당연한 듯 따르는 무엇인가를 선택하지 않을 가능성을 보여줬기에, 랜턴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위안이 되는 캐릭터가 아닐까.

 

<슬럼독 밀리어네어>

인도 빈민가 출신의 '자말'(데브 파텔)은 큰 상금이 걸린 퀴즈쇼에 참가한다. 자말이 좋은 성과를 낼 거라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지만, 거침없이 최종 라운드까지 오른다.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받은 그가 답을 맞힌 데에는 부정행위에 있었을 거라는 의심과 함께, 자말은 사기죄로 체포된다. 자말은 경찰에게 자신의 경험들이 퀴즈의 답이 되었다는 걸 밝히면서, 살아온 과정을 설명한다.

<슬럼독 밀리어네어>(2008)는 인도 소설가 비카스 스와루프의 장편소설 'Q&A'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으로, 사이몬 뷰포이의 과감한 각색과 대니 보일의 감각적인 연출 덕분에 매력적으로 영화화됐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촬영상, 편집상, 음악상 등 최다 부문을 석권하며 그해에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 됐다.

<슬럼독 밀리어네어> 트레일러 

자말의 삶을 살펴보면 그의 삶은 늘 퀴즈쇼에 가깝다. 다만 상금 대신 목숨을 걸고 여러 가지 보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퀴즈쇼다. 모든 이의 삶은 퀴즈쇼처럼 답을 선택해야 하지만, 계급이 뚜렷한 사회에서는 선택에 따른 보상과 손해가 천차만별이다. 삶이 던져주는 우연은 행운일 때보다 가혹할 때가 더 많다. 삶의 던져준 문제 앞에서 어떤 선택지를 택할 것인가. 영화가 끝나고, 삶이 진행하는 퀴즈쇼는 계속된다.

 

<127 시간>

여행을 즐기는 '아론'(제임스 프랭코)은 미국 유타주 블루 존 캐니언을 돌아다닌다. 아론은 홀로 등반에 나섰다가 절벽에 떨어지고, 자신과 함께 떨어진 거대한 바위에 오른팔이 짓눌린다. 아론은 싸구려 칼과 산악용 로프, 작은 물통 등 자신이 가진 물건을 이용해서 탈출하려고 하지만 팔을 누른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른팔의 감각이 무뎌진 채 시간은 흐르고, 아론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탈출을 위한 방법을 고민한다.

<127 시간>(2010)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사이몬 뷰포이의 각색, 안소니 도드 맨틀의 촬영, A.R.라만의 음악 등 이전 작품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함께 했던 스텝과 다시 한번 호흡을 맞췄다. 고립된 상황이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대니 보일은 자신의 주특기를 살려서 긴장감과 함께 빠른 전개를 보여준다.

<127 시간> 트레일러 

<127 시간>을 보면서 조난 시에 무엇을 챙겨야 할지 고민해본다. 여러 준비물을 생각하다가, 아예 돌아다니지 말아야겠다는 극단적인 생각에 이른다. 그러나 여행이 아니어도, 일상 속에서도 늘 예측 불가한 위험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최선은 최고급 맥가이버칼 같은 물질적인 준비물이 아니라, 짓눌린 오른팔을 자를지 결정할 판단력이나 100시간이 넘도록 고립되어도 포기하지 않을 정신력 같은 게 아닐까.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