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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배우는 대체 누구야?” <킬링 이브>를 본 사람들은 ‘빌라넬’을 보며 입을 모아 외친다. <그레이 아나토미>로 그동안 5번이나 에미상 후보에 올랐던 산드라 오는 그렇다 쳐도 저 괴물 같은 연기력의 배우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잔인무도하면서도 귀엽고, 천진난만하면서도 섬뜩한 사이코패스 킬러. 하긴 이토록 상반된 매력을 한데 담아내는 능력자가 궁금하지 않을 리 없지. 그의 이름은 바로 조디 코머.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은 아니다. 무려 13살부터 꾸준히 연기해온 경력자. 각종 드라마의 주조연으로 꾸준하게 필모를 쌓아온 배우다. 13살 때, 학교 선생님의 추천으로 BBC 라디오4의 목소리 연기 오디션에 합격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해 2019년 BAFTA에서 <킬링 이브>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때까지 출연한 작품만 스물다섯 편. BBC의 공무원이라 불러야 할 정도다.

<킬링 이브>로 이제 막 조디 코머에게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스물 다섯편은 사실 좀 버거울 수 있다. 그 버거움을 덜어주기 위해 조디 코머의 매력을 느끼기에 손색없는 4편의 작품을 골라봤다. 사랑스러운 사이코패스, 얄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친구, 신뢰할 수 없는 피해자, 순진한(?) 내연녀 등등. 조디 코머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평면적이지 않다. 한 단어로 단순화시킬 수 없다. 캐릭터 안에 늘 반전을 하나씩 숨기고 있다. 조디 코머가 유독 그런 캐릭터를 선택해왔기 때문일까? 작품을 보다 보면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자칫 단순해질 수 있는 캐릭터에 입체성을 불어넣는 것은 오히려 조디 코머이기 때문이다.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My Mad Fat 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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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가 있다. 예쁘고 몸매가 좋으면 왠지 성격이라도 안 좋아야 공평할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에서 조디 코머가 연기하는 ‘클로이’ 역을 보는 내 심정이 그랬다. 주인공 ‘레이’와는 다르게 날씬하고 인기도 많은 클로이. 곁에 있으면 그 존재만으로 자존감을 낮아지게 만드는 친구 클로이. 보는 내내 생각했다. 클로이가 언제쯤 레이의 뒤통수를 칠까? 저러다 언젠가 야비한 면이 나오겠지. 하지만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클로이는 예쁘고 몸매도 좋고 성격도 나쁘지 않은 몹시 평범한 아이일 뿐이라고. 때론 얄밉게 굴기도 하고 때론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레이의 좋은 친구라고.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친구가 얄미웠다가 안쓰러웠다가 친근해질 수 있는 건 그토록 예쁜 얼굴을 하고도 평범한 친구의 모습을 보여주는 조디 코머의 연기 덕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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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은 레이 얼이 10대 때 썼던 일기를 책으로 엮은 <My Fat, Mad Teenage Diary>를 각색한 드라마. 실제 일기가 바탕이 되어서일까? 클로이뿐 아니라 모든 캐릭터들이 우리가 겪었던 학창시절 친구들처럼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다. 특히 4개월간의 정신병원 생활을 마무리하고 나온 16살 레이 얼은 마치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자기 자신이 혐오스럽지만 동시에 안쓰럽고,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사랑이 두려운 딱 그 나이 때 우리의 모습. 그래서일까? 레이 얼의 고군분투와 성장은 드라마를 보는 우리의 마음을 다독여준다. 시즌3까지 보고 나면 마음 한구석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 일종의 치유 드라마랄까? 괜히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가 <스킨스>와 함께 10대를 다룬 드라마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게 아니다. 조디 코머를 보려고 시작했다가 마음까지 치유되는 일석이조의 효과까지 누릴 수 있으니 최근 삶이 유독 힘든 사람에게 특히 추천한다.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의 조디 코머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 예고편

 

<닥터 포스터(Doctor Fo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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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닥터 포스터>를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남편의 불륜을 추적하는 이야기. 특별할 것은 없다. 사랑하는 이의 배신은 만국 공통의 서사 아니던가. 하지만 이 평범한 내용의 드라마는 영국에서 그 해 최고 시청률(회당 평균 약 950만 명)을 기록한다. 비결은 스릴러 뺨치는 긴장감. 젬마 포스터 역의 수란 존스의 섬세한 심리묘사도 뛰어나다. 조디 코머는 이 드라마에서 불륜녀 ‘케이트’ 역. 비중이 크지도 작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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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남편의 내연녀’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릴 법한 이미지의 캐릭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캐릭터는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안쓰럽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어리석기도 하다. 특히나 시즌 2에피소드 한 회(4화)는 온전히 조디 코머의 몫으로 쥐고 흔든다. 시즌2가 시즌1의 성공을 뛰어넘는 시청률(약 1,200만 명)을 기록한 데에는 조디 코머의 지분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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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가 워낙 인기를 끌었던 덕에 눈도장을 제대로 찍은 조디 코머. 덕분에 에피소드도 많았다. <닥터 포스터>가 한참 방영 중일 때, 술집 화장실에서 어떤 여자에게 “당신이 <닥터 포스터>의 그 여자죠?” “나는 당신이 싫어요.”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디 코머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관객을 열광시키는 것을 좋아한다”면서 “사람들이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욕을 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말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천상 연기자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써틴(Thirt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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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살에 납치를 당해 13년 만에 탈출한 ‘아이비 목섬’. 죽은 줄 알았던 아이비가 살아 돌아오자 가족들은 모두 기뻐하지만 13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은 가족의 사이도 삐걱대게 만든다. 그 와중에 아이비는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모를 모호한 태도로 경찰들의 의심을 사고, 아이비를 납치했던 범인이 새로운 여자아이를 납치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간다. 이것이 조디 코머가 첫 주연을 맡은 작품, <써틴>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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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이라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고통을 겪은 인물을 상상만으로 연기해야 하는 쉽지 않은 도전. 심지어 전형적인 피해자의 모습도 아니다. 아이비의 눈빛과 표정은 어찌 보면 트라우마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무언가를 감추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런 아이비를 보며 과연 믿을만한 피해자인지 드라마를 보는 내내 시청자들은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한다. 이렇게 어려운 캐릭터를 제대로 연기해낸 덕분에 조디 코머는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BAFTA) 여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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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디 코머의 연기뿐만이 아니다. 드라마 자체도 완성도가 높다. 군더더기 없이 딱 떨어진다. 가족을 비롯한 경찰 캐릭터들도 모두 살아있다. ‘완성도 높은 작품을 첫 주연작으로 만날 수 있었던 조디 코머야말로 운 좋은 연기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다 반대로 <써틴>도 ‘‘조디 코머’라는 배우를 주인공으로 가질 수 있었던 게 행운이었겠구나.’ 하는 결론에 다다른다.

드라마 <Thirteen> 예고편

 

<킬링 이브(Killing 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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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라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있는 배우에게 엄청난 기회가 다가와 스파크가 확 튀는 그 지점. 그것을 운명이 아니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조디 코머가 스물다섯 편의 작품을 통해 연기력도 경력도 탄탄히 다져놓지 않았다면 <킬링 이브>의 빌라넬이 이토록 완벽할 수 있었을까? 반대로 조디 코머가 ‘빌라넬’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조디 코머라는 배우에게 이토록 빠질 수 있었을까? ‘빌라넬’과 ‘조디 코머’의 만남은 볼수록 참으로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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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조디 코머가 <킬링 이브>를 쓴 작가인 Phoebe Waller-Bridge의 작품 <Fleabag>를 보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그가 <Fleabag>에 빠질 일도 없었을 테고,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Phoebe Waller-Bridge의 이름만 보고 <킬링 이브>의 오디션에 지원하지도 않았을 테다. 만약 바르셀로나 음악 페스티벌에서 5일 동안 겪은 숙취 때문에 오디션장이 있는 LA까지의 13시간 비행을 포기했다면? 그래서 결국 <킬링 이브> 오디션 보는 것을 포기했다면? 일련의 사건들은 마치 모든 것이 계획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조디 코머가 결국 <킬링 이브>로 2019년 BAFTA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는 결말까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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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종합 리뷰 집계 사이트인 ‘메타크리틱’ 집계 결과 2018년 최고의 드라마로 꼽힌 드라마. 영국의 ‘가디언’지 선정 ‘2018년 최고의 드라마 1위’이자, 2019년 한국계 배우 최초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드라마. BAFTA 영국 아카데미 TV 시상식에 14개 부문이나 노미네이트 된 드라마이자 그 중 최고의 드라마상을 비롯해 3관왕을 차지한 드라마. 2018년 한 해를 뜨겁게 달구었던 첩보 스릴러 <킬링 이브>를 아직 안본 사람이 있다면 전하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 이토록 매력적인 드라마를 아직 볼 기회가 남아있다니 당신은 정말로 행운아라고. 이제, <킬링 이브>와의 운명적인 만남에 ‘조디 코머’라는 배우와의 운명적인 만남에 몸을 맡겨볼 시간이다.

<킬링 이브> 예고편
<킬링 이브> 명장면

 

Writer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카피 쓴다는 핑계로 각종 드라마, 영화, 책에 마음을, 시간을 더 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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