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희, 지영, 지수 등 여성을 대변하는 이름들이 있다. 그중 최근에 눈에 띄는 이름은 ‘은희’. 주로 영화 속에서 보편적인 여성 인물의 이야기를 하고자 할 때 이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극 속에서 관계 가운데에서 갈팡질팡하기도 하고,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자신, 그리고 우리. 그 관계 사이에 서서 치열하게 고민하다가 이내 손을 놓고 문제를 기억 저편으로 밀어버린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들의 모습 앞에 자신을 얹어본다. 은희들은 결국 우리들이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은 없다. <벌새>의 은희

14살 소녀 ‘은희’(박지후)는 평범하다. 가부장적인 부모님과 자상한 남자친구, 단짝 ‘지숙’과 함께하는 보통의 하루를 살아간다. 은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이토록 평범하지만, 그의 마음은 내내 불안하다. 은희는 깨닫고 있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중심이자 주인공이었던 세계는 사실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부모님이 내뱉는 한 마디에 상처받고, 주는 만큼 받고 싶던 관심과 마음은 온전히 돌아오지 않는다. 매일이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생각 보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는 나날이다. 자신에게는 커다란 슬픔으로 다가오는 각각의 일들이 어른들 사이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스쳐 지나간다. 그 과정 속에서 은희 스스로도 두려움과 혼란스러움을 밀어내고 다시금 즐겁게 하루를 살아가고자 하지만 쉽지 않다.

영화는 은희를 통해서 개인의 상처는 덮어진다고 사라지지 않으며, 잊고 있는 듯 살던 어느 순간에 툭 하고 튀어나올 수 있음을 말한다. 또한, 전혀 자신과 관계가 없을 거라 여겼던,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여겼던, 사회적 분위기와 사건들이 개인에게 크고 작게 영향을 미치고, 또 이는 개인의 사소한 경험과 인식으로 저장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처럼 크고 작은 일들 속에서 관계 때문에 흔들리고, 차갑고 싸늘한 타인의 시선을 알아차린 은희에게 관객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겹쳐 보게 된다.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치부하며 살았던 기억의 조각들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극중 은희에게 가장 힘이 되었던 선생님처럼 스스로를 토닥거리게 한다.

 

우리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 <최악의 하루>의 은희

배우 지망생인 ‘은희’(한예리)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바람둥이 남자친구 ‘현오’, 과거 유부남인데도 은희를 만났던 ‘운철’, 우연히 길을 물어본 ‘료헤이’까지. 은희는 이들을 하루에 모두 만나는 일이 벌어진다. 그 하루가 영화의 제목처럼 ‘최악의 하루’가 되었던 이유는 은희가 그들에게 내뱉었던 말들 때문이다.

이 영화의 핵심 키워드는 ‘거짓말’이다. 영화의 초반부 작가인 료헤이는 은희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거짓말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결국, 이 말은 은희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그는 거짓말로 자신을 포장하고 사람들을 대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은희를 손가락질할 수 없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거짓말에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남자친구가 밉지만 헤어지고 싶지 않고, 새로운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으며, 지나간 사랑에게 당당하고 싶은 진심. 누구나 느껴봤을 감정이기에, 또 누구나 해봤을 소소한 거짓말이기에, 관객들은 은희에게 감정이입한다. 그리고 은희를 보며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그들은 내가 하는 거짓말 속에 진짜 내가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하는 이유, 그곳에 본인도 몰랐을 수도 있는 진심이 있고, 진짜 ‘내’가 있다.

 

타인의 상처를 마주하는 보통의 사람, <한공주>의 은희

영화 <한공주>의 ‘은희’(정인선)는 주인공이 아니다. 은희는 갑자기 전학 온 ‘한공주’(천우희)에게 관심을 가지고 가까워지는 친구이다. 아카펠라 그룹의 리더인 은희는 우연히 공주의 노랫소리를 듣게 되고, 함께하고자 공주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그저 순수하고 밝은 은희의 행동과 말에 전 학교에서 집단 성폭력을 당한, 큰 상처를 가진 공주의 마음도 점차 풀어진다. 자신의 상처를 굳이 끄집어내어 보여주진 않지만, 은희 앞에서 본연의 모습이 나오고,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씩 흘리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은희에게 고마운 마음과 다시금 안정을 찾은 공주를 보며 안도감이 들면서도 불편하다. 은희가 그저 착하고 맑게만 나와 현실성 있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지점 때문에 은희와 대비되는 공주의 상처가 더욱 어둡고 아프게 다가온다.

그러나 은희에게 공감하는 부분은 극 후반에 등장한다. 은희는 원하지 않게 공주가 숨기고 싶어 하던 과거를 알게 된다. 순수하게 잘 되길 바랐을 만큼 아끼고 소중했던 친구의 아픔을 마주하는 순간, 그렇게 빛나던 은희는 빛을 잃고 무력해진다. 벼랑 끝에 몰린 공주가 마지막으로 찾던 유일한 사람인 은희는, 공주가 청한 구원의 요청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 손을 잡기를 주저한다. 그는 타인의 거대한 슬픔을 바로 마음으로 끌어안기에 너무 어리고 약했다. 그렇기에 공주의 상황이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지만 은희를 탓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주저함이 가져온 결과는 모두 앞으로 그가 감당해야 할 몫임을 알기에 더더욱 그렇다. 우리 모두 주변을 외면한 후회와 죗값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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