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영국의 영화감독 마이크 리는 자신이 태어난 도시 샐퍼드로부터 명예시민 훈장을 받았다. 마이크 리는 영국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는 영화를 만들어왔고, 시의회는 그 공로를 인정해서 개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상을 줬다. 마이크 리는 영국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그의 영화 안에는 삶의 위트와 비극이 적절한 비율로 섞여서 드러난다. 실제 우리 삶처럼 잔잔한 몇 번의 웃음과 견디기 힘든 슬픔이 함께 등장한다. 

그의 영화를 통해 연기를 인정받은 배우들이 특히 많은데, 마이크 리는 리허설을 통해 배우들과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배우들의 연기부터 각본까지, 마이크 리는 과장이 아닌 ‘진짜’ 풍경을 담아내려고 노력한다. 마이크 리가 보여주는 진짜 삶에 가까운 영화를 살펴보자.

마이크 리 감독, 출처 – ‘imdb

 

<네이키드>

‘조니’(데이빗 듈리스)는 맨체스터를 도망치듯이 떠나서 런던에 온다. 조니는 옛 애인 ‘루이즈’(레슬리 샤프)의 집에 찾아간다. 조니는 루이즈의 룸메이트 ‘소피’(카트린 카틀리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소피는 조니를 사랑하게 된다. 조니는 루이스와 재회 후에 티격태격하다가 거리로 나간다. 조니는 거리에서 만난 이들에게 농담 같은 말들을 늘어놓는다.

<네이키드>(1993)는 칸영화제에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은 작품이다. 데이빗 듈리스 외에도 마이크 리의 작품을 통해 국제영화제에서 연기상을 받은 배우들이 많은데, 배우들에게 정해진 대본을 따르는 연기보다 실제 반응에 가까운 연기를 요구하는 마이크 리의 연출 방식이 자연스러운 연기를 이끌어낸다. 마이크 리는 한번 작업했던 배우들과 계속해서 작업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의 작업 방식은 배우 입장에서 도전이자 매력적인 제안이다.

<네이키드> 트레일러

<네이키드>에는 희망이 없다. 조니가 뱉는 말들은 절망적인 미래에 대한 확신 혹은 한없이 가벼운 농담이다. 인물들 사이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궤변 같은 말들이 떠돌고, 그 누구도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관해 확신하지 못한다. 그 어떤 희망도 없이 사는 인물들을 보면 ‘복지국가’라는 말이 허상처럼 느껴진다. 대책 없는 이들이라고 이들을 비판하기 전에, 이들에게 절망을 안겨준 사회에 관해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다.

 

<비밀과 거짓말>

‘호텐스’(마리안 장 밥티스트)는 양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자신의 생모를 찾기로 결심한다. 호텐스는 자신의 입양기록을 보면서, 친어머니가 자신과 같은 흑인이 아니라 백인이라는 것에 혼란을 느낀다. 호텐스의 생모 ‘신시아’(브렌다 블레신)는 자신의 삶을 동생 ‘모리스’(티모시 스폴)와 딸 ‘록산’(클레어 러시브룩)을 위해 다 썼다고 생각하고 외로워한다. 호텐스는 용기를 내어 신시아에게 전화를 건다.

<비밀과 거짓말>(1996)은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은 작품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브렌다 블레신 외에도 출연한 모든 배우의 호연이 돋보인다. 인물들 간의 관계가 중요한 작품으로, 인물들 사이의 비밀과 거짓말이 드러날 때마다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비밀과 거짓말> 트레일러 

삶에 비밀과 거짓말이 없는 이가 존재할까. 솔직한 관계를 원하지만, 비밀과 거짓말이 전혀 없는 관계를 보는 건 쉽지 않다. 비밀과 거짓말이 관계를 좀 더 건강하게 만들 거라고 판단할 때가 많다. 행복을 위해 우리가 허용할 수 있는 비밀과 거짓말의 선은 어디까지일까. 인종과 계급, 관계에 대한 비밀과 거짓말에 대해 말하던 마이크 리는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살면서 해온 비밀과 거짓말이 당시로써는 최선의 선택이었냐고.

 

<베라 드레이크>

‘베라’(이멜다 스턴톤)는 부잣집에서 청소부로 일하며 돈을 벌고, 집안일을 전담하고 병든 노모를 돌보는 등 정신없이 살아간다. 바쁜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아량이 넓은 베라를 주변에서는 모두 천사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다만 가족도 모르는 게 하나 있는데, 베라는 어려움에 부닥친 이들을 도와준다는 마음으로 가족 몰래 오랜 기간 불법 낙태 시술을 해왔다.

<베라 드레이크>(2004)는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은 작품이다. 마이크 리의 연출 방식대로 배우들에게 영화에 대한 정보를 거의 주지 않아서, 영화 속 배우들의 반응은 실제 반응에 가깝다. 인물들의 반응을 보면서 나라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상상하게 된다.

<베라 드레이크> 트레일러

베라는 선한 의도로 불법 낙태 시술을 했다. 사회 분위기 때문에라도 몰래 낙태를 해야 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낙태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베라도 하층민이고, 베라가 도와준 이들도 하층민이다. 베라를 무작정 범법자라고 비난하기에는, 현실과 동떨어진 법을 유지한 사회의 탓도 있지 않을까? 베라처럼 모든 비난의 화살을 한 개인이 받게 하고 모른 척하는 사회는 절대 건강하지 않다.

 

<해피 고 럭키>

‘포피’(샐리 호킨스)는 자전거를 도둑맞은 뒤에도 ‘작별 인사를 제대로 못 했는데’라고 생각할 만큼 긍정적이다. 초등학교 선생님인 포피는 남들 눈치 안 보고 일과 놀기 모두 열심히 하며 지낸다. 포피는 자전거를 잃어버린 김에 자동차 운전 연수를 받기로 하고, 까칠한 연수 강사 ‘스콧’(에디 마산)을 만난다.

작년에 국내에 개봉한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이 사랑받은 이유 중 하나는 주연배우인 샐리 호킨스의 연기 때문일 거다. 샐리 호킨스는 작품마다 전혀 다른 캐릭터를 소화하는 배우로, 마이크 리 감독의 <베라 드레이크>와 <해피 고 럭키>에 연달아 출연하면서 전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한다. 샐리 호킨스는 <해피 고 럭키>(2008)로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는데, 과하게 느껴질 수 있는 낙천주의자 캐릭터를 적절한 무게감과 함께 소화했다.

<해피 고 럭키> 트레일러 

세상의 눈치를 안 보고 행복만 외치는 포피의 태도는 만인에게 환영받기는 힘들어 보인다. 행복은 추상적으로 배우고 경쟁은 구체적으로 배운 사람들에게, 포피의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자세는 낯설게 느껴지는 게 당연하다. 행복은 클수록 좋다고 말하는데, 정작 포피의 몇몇 부분은 과하게 느껴진다. 행복을 절제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일까. 포피의 한계 없는 행복을 보고서도 행복을 정량화하기 바쁘다는 게 씁쓸하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