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는 더위가 싫어 허공에 날린 몇 마디 육두문자들은 금세 잊었다. 벌써 수십 차례를 반복해 온 계절 변화 앞에, 우리는 생각보다 의연하지 못하다. 다시 여름과 가을의 길목에 선 지금에서야 가는 여름이 아쉬운 심정이 돼 버렸으니까. 지금이야말로 차이밍량의 영화와 함께하면 좋을 적기 중의 적기다. 한 여름의 습기를 닮은 영화들. 사실 습기라는 단어도 어딘가 미진한 느낌이 있다. 그의 영화는 축축하게 젖은 우기의 찝찝함이 폐허의 감각으로 장악하고 있다.

<하류>

갈수록 스스로 “사회주의자가 돼 가는 것 같다.”던 차이밍량. 그의 영화 예술은 적당히 타협하거나 뒤로 가는 법이 없었다. 데뷔 이래 자신이 천착한 '고독한 인간'이라는 화두는 나날이 새로운 이미지로의 변주를 거듭해 왔고, 그건 “영화는 보는 예술”이라 믿는 그의 신념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차이밍량이 그리는 정서는 누수의 이미지로, 갈증의 이미지로, 때론 병든 몸이나 구멍 난 바닥이 되어 우리 앞에 펼쳐졌다. 지난 2018년 공개된 그의 신작 <너의 얼굴>은 여러 사람의 얼굴을 딥 클로즈업으로 관조한 새로운 영화 언어의 창조이자 시도였다. 그는 직접 말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며 상대방의 얼굴을 자세히 보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익숙한 사람일수록 그렇더라. 내 어머니의 얼굴을 가장 열심히 바라본 때는 어머니의 임종 직전 30분이었다.”라고. 영화 바깥에서도 차이밍량은 다른 길을 택한다. 2013년 <떠돌이 개>를 연출한 뒤로는, 대만 시장의 상업적 영화 구조와 결별을 선언하고 새로운 배급 방식을 찾아 나섰다. 이건 그에게 있어 어떤 개척자의 정신이 아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서다.

<청소년 나타>

그런 차이밍량의 영화 세계를 탐색하기 위해, 데뷔작부터 천천히 따라가는 정공법을 추천한다. 데뷔작 <청소년 나타>를 포함한 초기 네 편의 장편에서 그는 인간의 근본적인 고독을 향해 점진적인 세계를 지어 나갔다. 페르소나 이강생과 함께한 시작점도 <청소년 나타>였다. 과거 배우를 찾던 차이밍량이 오락실 입구에서 캐스팅한 이강생은 그에게 얼마간의 후회를 주었다. 제발 자연스럽게 연기하라고 요구하자 이강생은 “이게 내 자연스런 모습이다.”고 화를 냈다. 이때 차이밍량은 자신의 기준을 기꺼이 버렸다. 이후 지금까지 그의 영화 속에서 이강생은 저 너머의 쓸쓸함을 품은 얼굴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차이밍량이 그린 축축한 폐허의 한 가운데서, 이강생이 보내온 고독의 몸짓을 읽어 보자.

 

<청소년 나타>

이강생은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대체로 '샤오캉'이라는 이름의 남자다. 샤오캉의 소통 불가한 아버지는 배우 티엔 미아오가, 주술에 의존하는 어머니는 배우 류이칭이 했는데 이 가족 구성은 차이밍량의 다른 영화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청소년 나타>는 두 청년 샤오캉과 ‘아체’(진소영), 그리고 한 여성 ‘아퀘’(왕유문)를 통해 부유하는 청년들의 삶을 비춘다. 정처 없는 삶의 근거도, 결과도 되는 이들의 유일한 소유물 '바이크'에 의지해 여관과 오락실, 술집과 전화 데이트 알바를 전전한다. 특히 수챗구멍이 막혀 물이 들어찬 아체의 방은 차이밍량의 첫 번째 폐허의 이미지로 기억할 만하다.

 

<애정만세>

역시 세 남녀가 주인공이다. 세 사람에게 설정된 '세일즈'라는 직업적 숙명이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감각을 끌어 올린다.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메이린(양귀미)는 영화 내내 한 번도 거래를 성사시키지 못한다. 신소재 유골함을 파는 샤오캉(이강생)이나, 경찰의 눈을 피해 거리에서 잡동사니를 파는 아핑(진소영)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이들을 주로 원경으로 응시하는 카메라는 뭔가를 팔기 위한 말들 이외에 남은, 긴 침묵의 시간들에 관심을 갖는다. 팔지 못한 집의 빈 매트리스에 숨어든 세 남녀의 얼굴이, 관계에의 용기는 없지만 사람의 흔적을 쫓는 쓸쓸함에 관해 이야기하는 듯한 영화.

 

<하류>

<하류>에 이르자 ‘샤오캉’(이강생)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린다. 우연히 만난 동창생을 따라 영화 현장에 갔다가 강 하류에 떠오른 시체 역할을 대신한 샤오캉. 단지 몇 초간 시체 연기를 했을 뿐인데 아무리 몸을 씻어내도 불쾌한 냄새가 나는 듯한 착각을 겪는다. 이 냄새는 곧 통증이 된다. 목 부위의 결림 증상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한편 게이 사우나를 전전하던 아버지의 방은 여기저기서 빗물이 새고, 이 누수의 이미지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결말부엔 소통이 단절된 아버지와의 엇갈린 이상 소통의 극단이 기다린다. 점차 단출해지는 스토리 라인과 농밀해진 롱테이크가 인상적인 차이밍량의 대표작.

 

<구멍>

세 작품을 경유해 <구멍>에 닿으면, 차이밍량의 두 가지 변화를 만날 수 있다. 원인불명의 전염병으로 대만 사람들은 물리적, 정서적 격리 상태에 놓여 있다. '타이완 바이러스'로 이름 붙여진 열병은 독감 증세에서 시작해, 벌레처럼 땅을 기다가, 빛을 두려워하며 구멍으로 숨어드는 행동을 보인다. 정부의 이주 명령을 거부한 남자(이강생)와 여자(양귀미)는 각각 위층과 아래층에 살고 있다. 누수 피해를 전혀 겪지 않은 남자와 달리, 여자의 집은 날마다 흠뻑 젖은 벽지 아래서 물을 짜낸다. 누수의 원인을 찾기 위해 헤집어진 남자의 방바닥엔 점차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 여기서 단절된 두 공간, 폐허의 절망에 손을 내미는 희망의 단서가 처음으로 발견된다. 영화 사이마다 시도된 경쾌한 뮤지컬까지, 여러 면에서 차이밍량의 흥미로운 저작임에 틀림없다.

 

Writer

예측 불가능하고 아이러니한 세상을 닮은 영화를 사랑한다. 우연이 이끄는 대로 지금에 도착한 필자가 납득하는 유일한 진리는 '영영 모를 삶'이라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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