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밥(Hard Bop)은 비밥에서 파생된 서브 장르로, 1950년대 중반 비밥과 알앤비(R&B)가 어우러지면서 대중에 친숙한 음악으로 진화했다. 귀에 쉽게 다가오는 멜로디와 반복적인 펑크 리듬을 강조하여 펑키 하드밥(Funky Hard Bop)이라 불리기도 했다. 당시 이를 주도한 밴드는 드러머 아트 블래키(Art Blakey)의 재즈 메신저(Jazz Messengers). 당시 스타 연주자였던 트럼펫의 리 모건(Lee Morgan)과 테너의 베니 골슨(Benny Golson)을 전면에 내세웠는데, 블루노트와의 첫 앨범 <Moanin’>(1958)은 하드밥을 대표하는 명반이 되었다.

앨범 <Moanin’>(1958)의 타이틀곡 ‘Moanin’’ 실황

당시 재즈 메신저의 주역 중 한 명으로 수많은 하드밥 스탠더드를 작곡하였지만, 그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피아니스트가 바로 바비 티몬스(Bobby Timmons)다. 그가 작곡한 ‘Moanin’’은 하드밥 장르에서 가장 유명한 곡이 되었고, 후일 가사를 붙여 노래로 부르기도 했다. 그는 리 모건의 룸메이트로 같은 아파트에 함께 살며 피아노 한 대를 마련하여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했다. 곧 이어 더 많은 급여를 보장한 캐논볼 애덜리의 밴드에 합류하여 명반 <Cannonball Adderley Quintet in San Francisco>(1959)에 수록한 자신의 곡 ‘This Here’ 또한 대단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공연장에 있던 대부분 관객이 이 곡을 연주할 것을 연호하여 밴드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캐논볼 애덜레이의 연주로 유명한 ‘This Here’(1959)

하지만 이 곡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저작권 수입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캐논볼 애덜리의 밴드에서 나와 다시 아트 블래키에게 합류했다가 이내 자신의 트리오를 조직했다. 트리오는 그의 오리지널에 힘입어 인기를 구가하지만 1960년대 들어 퇴조하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부터 시작한 그의 음주와 습관적 마약 복용 또한 발목을 잡았다. 그는 술과 마약에 취하여 스튜디오 녹음에 빠지기 일쑤였고, 마약을 사는 데 대부분의 수입을 탕진했다. 1974년에는 클락 테리의 빅밴드에 합류하여 유럽으로 순회공연을 떠났으나, 비행기 안에서 너무 많은 술을 마셨고 스웨덴의 공연장에서 넘어져 한 차례의 공연도 치르지 못한 채 귀국 비행기를 타야 했다. 이때가 그의 마지막 활동이었다. 그 해 3월 간 경화로 38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This Here Is Bobby Timmons>(1960)에 수록한 ‘Dat Dere’

그는 아트 블래키가 발굴한 하드밥 스타 중 한 명이었다. 목사였던 할아버지 교회에서 피아노 연주를 시작한 그는, 가스펠 스타일의 ‘Moanin’’, ‘This Here’, ‘Dat Dere’와 같은 유명한 재즈 스탠더드를 남겼다. 그의 오리지널은 모두 하드밥의 스탠더드가 되어 당시 주크박스의 인기곡이었으나, 그에게 남겨진 재산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마저 마약으로 탕진하였다. 만약에 그가 지금처럼 지적재산권이 합리적으로 보호되는 시대에 태어났다면 저작권 수입으로 돈방석에 앉았을 지도 모른다. 그는 재능에 걸맞은 명성을 누리지 못한 채, 젊은 시절 룸메이트였던 리 모건처럼 30대를 넘기지 못하고 이른 생을 마감했다.

오스카 브라운 주니어는 'Dat Dere'에 가사를 붙여 상업적인 성공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