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휴가철도 끝나고 여름도 이제 막바지다. 일정이 빼곡해 제대로 휴가도 못 떠난 이들이라면 여행에 관한 책으로 아쉬움을 달래 보는 건 어떨까? 산해진미를 맛보고 오성급 호텔에서 셀카를 찍는 흔한 레퍼토리 말고, 저만의 고유명사를 가진 여행책을 읽어보자. 관광의 스펙터클에 집중하기보단 여행이 한 개인에 끼치는 영향을 기록한 두 권의 책을 소개한다.

 

여행의 이유

책이란 어쩔 수 없이 간접 경험이다. 아무리 곡진하게 적어도 당사자가 아니면 한갓진 소리로 들리기에 십상이다. 누군가의 글을 읽고 공명할 수 있으려면, 결국 저자의 감정에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 김영하의 여행책 <여행의 이유>는 대부분의 걸출한 산문이 그렇듯 여행 중에 일어난 이런저런 실패담을 통해 저자 특유의 색을 입힌다. 좌충우돌 모험기를 읽으며 독자는 마치 편안한 소파에 앉아 재난 영화를 보듯 흥미를 느낀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작가는 그 실패가 일상에 남긴 자국을 유려한 필치로 적는다. 그것은 여행의 교훈이라거나 실패를 딛고 성장했다는 식이 아닌, 일상 밖에서 오롯이 자신이 된 순간의 여파다. 우리는 시간이 흐른 후에야 여행이라는 서사가 내게 남긴 걸 끄집어낼 수 있다. 누구에게나 여행엔 저만의 고유한 서사가 깃들기 마련이니까. 독자는 책을 읽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어느 한 편에 묻어두었던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고, 저자의 실패담이 결코 나와 멀지 않음을 깨닫는다. <여행의 이유>는 이처럼 여행이 가진 한계와 실체를 포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낭만적인 여행이 끝난 후에 곱씹을 수 있는 얘깃거리를 제공한다.

김영하는 프랑스 작가 실뱅 테송의 말을 빌려 여행은 여행자가 외부 세계에 감행하는 습격이며, 여행자는 언젠가 노획물을 잔뜩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약탈자라고 말한다. 나 역시 간혹 명동 거리를 걸을 때 무수한 관광객에 질리곤 한다. 어릴 적 추억이 새겨진 명동 성당마저 빼앗긴 기분이 들어 얼른 군중을 피해 을지로 귀퉁이로 달아난다. 현지인은 타국에서 온 손님을 달가워 않는다. 어렵사리 돈을 모으고 짬을 내 휴가를 왔을 이들이 그저 귀찮을 뿐이다. 유럽에서도 요즘 주요 관광 도시가 오버 투어리즘으로 고생한다. 도시를 점유한 여행자로 인해 거리마다 인산인해고, 현지인이 찾는 카페가 관광객에 잠식된 지 오래다. 작가 수전 손택은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진다 해도 여행은 영혼의 식민주의라 칭하기도 했다. 이는 최근 전 세계에 화두로 떠오른 난민 문제와 엮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외지인에 대한 배척이 만연하고, 혐오를 조장하는 움직임이 횡행한다. 이런 배척의 기류에 대해 김영하는 자신이 배낭여행을 하던 일화를 언급하며 경계의 목소리를 높인다. 그는 이십 대에 떠난 유럽 배낭여행에서 기대치 않은 환대를 받았다. 그저 여행자라는 이유로 친절을 베풀었다. 그가 잘나거나 불쌍해 보여서가 아니라 낯선 곳에 떨어진 이방인이라는 사실에 커피 한 잔을 대접했다. 김영하는 이런 기억에 보답하기 위해 가끔 한국에서 길을 헤매는 외국인에게 친절을 베푼다고 한다. 자신이 받은 덕을 순환하고자 한다. 그것이 이 지구에 잠깐 머물다 떠나는 무수한 여행자가 서로에게 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일이라고. 여행자란 늘 초행인지라 어리숙하기 마련이고, 타인의 친절 없이는 곤란에 빠지고 만다. 이처럼 김영하는 여행이 지닌 폭력성에 비추어 순환하는 환대의 가치를 상기한다.

 

발칙한 유럽산책

<발칙한 유럽산책>은 작가 빌 브라이슨의 대표작이자, 무엇보다 무용한 여행책의 대표 격으로 꼽힌다. 오히려 이 책을 읽으면 여행을 가기 싫어질 수도 있다. 이 책엔 여행지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시피 하고, 작가가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온갖 불평을 해대는 통에 낭만이 깃들 새가 없다. 북유럽에 오로라를 보러 갔다가 호텔에서 싸운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고, 밤마다 호텔 바에서 술을 마셔대는 통에 숙취만 가득하다. 성격은 어찌나 고약한지 온 도시에 대고 일갈을 늘어놓는다.

관광지는 사람이 많다고 피하고 식당에선 별 심술을 다 부려대는 통에 골치가 다 아프다. 빌은 대머리에 뚱뚱하고 배고프면 성질을 내는 고약한 아저씨다. 그에게 여행이란 허황한 환상을 벗기는 작업일 뿐이다. 집의 안락함을 기꺼이 버리고, 낯선 땅으로 날아와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애초에 잃지 않았을 안락함을 되찾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돈을 쓰면서 덧없는 노력을 하는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런 시큰둥한 태도 기저엔 유럽을 바라보는 냉철한 현실감각이 자리한다. 가령 북유럽의 자발적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이를 지탱하기 위해 시민들이 감수해야 하는 살인적인 물가엔 비판을 가한다. 서유럽에선 거대 도시가 지닌 화려함 이면에 사치와 향락으로 찌든 도시의 천박함을 언급하고, 경제가 몰락한 동유럽을 묘사하는 대목에선 체제 경쟁에서 내쳐진 그들을 보며 복잡한 심경을 토로한다. 무엇보다 미국인이라는 바깥의 시선과 유럽을 오랫동안 동경해왔던 지식인의 통찰이 버무려져 뒤틀린 유머를 빚어낸다. 각 나라에 대한 풍부한 역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되, 여행 곳곳에 묻어있는 잔재미를 풀어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발칙한 유럽산책>의 저자 소개문에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여행 작가’라는 문구가 있다. 난 거기에 덧붙여 '세상에서 가장 박식한 여행 작가'라 칭한다. 빌 브라이슨은 1951년생 할아버지로 서른 무렵부터 영국에 살았다.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미국인이지만, 영국에서 더 많은 시간을 살아온 셈이다. 실제 영국인이 좋아하는 작가로 손꼽힌다. 빌 브라이슨은 '더 타임스'와 '인디펜던트'라는 거대 신문사에서 오랫동안 기자 생활을 했고, 그 기간 중 책을 몇 권 냈는데 족족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후 시큰둥하고 매사 독설을 늘어놓는 빌의 영국식 유머는 수많은 고정 팬을 양산했다. 한국에선 '발칙한' 시리즈로 유명해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작가는 유럽에 대해 오랜 역사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그에 걸맞은 인격을 갖춘 곳이라며 애착을 표한다. 자그마한 땅덩어리 안에 옹기종기 모여 사람들은 늘 옆구리에 책을 끼고 거리엔 아기자기한 카페가 가득하다. 발품을 조금만 팔면 유서 깊은 박물관이 있고, 그 옆 그림 같은 공원을 산책하는 이들이 있다. 저자는 미국과는 다분히 상반된 특성을 가진 유럽 문화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여행기를 써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낭만이 깃든 도시 오스트리아 빈에선 불친절함을 비꼬고, 피렌체에서는 이탈리아 국민 특유의 낙천성이 빚어내는 유쾌함을 엿본다. 유명한 범죄소설 작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리플리>의 배경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카프리섬은 불평투성이 빌 브라이슨이 감복한 근사한 경관을 자랑한다. 무엇보다 빌은 파리에 가서 에펠탑을 안 보고 로마에선 콜로세움을 언급조차 안 한다. 우선 인파가 북적거리면 성질이 나는지 도시 귀퉁이 자그마한 박물관으로 달아나버린다. 빌의 저질 농담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터키 술집 주인과의 한바탕 소동이나, 광장에서 이상한 짓을 하는 이탈리아 커플의 추태를 묘사하는 대목엔 잔재미가 빼곡하다. 마치 프랙털(fractal) 현상처럼 지엽적인 사건에서 그 도시의 맥을 짚어내는 솜씨가 절묘하다.

빌 브라이슨은 책의 말미에 북유럽에서 서유럽, 동유럽으로 이어진 여정을 끝맺는다. 애초에 계획대로 아시아 대륙까지 여행하겠다는 계획을 취소한다. 긴 여정이 가져다준 극도의 피로감을 호소한다. 여행을 멈춰야 할 때는 언제일까. 여행이란 자신을 추동하는 내적 동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 시작과 끝을 자신이 온전히 짊어져야 마땅한 고유의 서사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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