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신 땀을 닦으며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구수한 입담을 과시하고, 걸쭉한 목소리로 노래하며, 동시에 트럼펫도 연주한 루이 암스트롱. 미국 남부의 길거리 음악에서 시작한 재즈 역사에 첫 스타로서 이름을 올렸으나, 만담꾼이나 엔터테이너 이미지 때문에 재즈 아티스트에 걸맞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의 생애와 음악에 대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실이나 오해하고 있던 진실에 대해 알아보았다.

 

궁핍한 환경에서 5달러를 주고 구입한 악기

루이 암스트롱은 뉴올리언스의 궁핍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10대 미혼모와 할머니 아래서 자란 그는, 어릴 때부터 돈을 벌기 위해 행상을 하던 이웃집에서 가서 일하곤 했다. 이웃은 리투아니아에서 이민 온 유태인 가정이었는데 마치 그를 아들처럼 돌봐 주었다. 그들은 암스트롱에게 처음으로 5달러짜리 악기를 사주었는데, 바로 코넷(Cornet)이었다. 후일 성공한 암스트롱은 종종 ‘다윗의 별(Star of David)’ 문양의 목걸이를 하고 다녔는데,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루이 암스트롱의 1938년 녹음으로 유명해진 가스펠 곡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소년원에서 처음으로 배운 음악

그는 열한 살의 나이에 길거리에서 총을 발사한 혐의로 체포되어, ‘Colored Waif’s Home for Boys’라 불리던 소년원에서 18개월을 복역했다. 하지만 이 기간은 그에게 인생 역전의 계기가 되었다. 교도소의 음악 교사 피터 데이비스(Peter Davis)에게 처음으로 음악을 배웠고, 출소 후에는 다시 떠돌이 생활로 돌아가지 않고 인근 술집에서 코넷 연주를 계속하며 뉴올리언스의 스타 연주자로 떠올랐다. 그는 전국구 스타로 부상한 후 자신의 첫 음악교사를 고용했고, 그 역시 인기 연주자가 되었다.

루이 암스트롱과 그의 첫 음악선생 피터 데이비스(좌)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분리정책에 맞서다

그는 평생 동료들로부터 ‘Uncle Tom’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모자란 흑인 연기로 백인의 인기를 얻었고, 백인에게만 허용되던 호텔이나 식당에 출입할 수 있던 스타였으나, 흑백 분리 정책의 문제점에 대해 눈을 감고 말을 삼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1957년 아칸소 인종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는 인터뷰에서 관련 질문을 받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연방 정부를 비난하며 아칸소 사건에 개입할 것을 주장하였고, 연방 정책의 일환으로 소련을 방문하려던 계획을 보류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부 백인 팬들은 그의 공연을 보이콧하기도 하였다.

루이 암스트롱에 관한 단편 다큐멘터리 <To Be Black and Blue>

 

평생 그를 괴롭힌 입술 부상

그는 트럼펫 연주 중 갑자기 높은 음을 짚으며 자신의 독창적인 연주 스타일로 자리를 잡았으나, 이 때문에 항상 입술 부상에 시달려야 했다. 비슷한 부위가 찢어지고 아무는 과정을 반복하게 되니, 그의 입술 부위는 딱지가 내려앉아 나무처럼 딱딱하게 되었고 그의 두툼한 입술을 상징하는 ‘새치모’(Satchmo)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의 딱딱한 입술은 의학계에서도 유명해져 트럼펫 연주자들에게 발생하는 입술 부상을 ‘Satchmo’s Syndrome’라 부르게 되었다.

루이 암스트롱의 ‘La Vie En Rose’(1950)

 

62세의 나이에 빌보드 정상에 올라서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Hello Dolly!>는 1964년에 처음 소개되어 10개의 토니상을 수상한 인기 뮤지컬이다. 그해 겨울 뮤지컬 홍보를 위해 동명의 타이틀곡을 루이 암스트롱에게 부르게 하였는데, 이 곡이 싱글로 출반되어 당시 맹위를 떨치던 비틀스의 인기곡들을 끌어내리며 빌보드 톱에 올랐다. 이 곡은 이듬해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곡’으로 선정되며 암스트롱에게 그래미 2관왕을 안겼고, 암스트롱 최고의 히트곡이 되었다. 당시 64세의 나이에 빌보드 1위에 오른 이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루이 암스트롱의 ‘Hello Dolly!’ 실황

 

루이 암스트롱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