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늘 좋은 각본을 기다린다. 배우가 직접 자신이 참여할 영화의 각본을 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거다. 실제로 이야기꾼의 기질이 있는 배우들은 자신이 등장하는 영화에 각본가로도 이름을 올린다. 엠마 톰슨, 맷 데이먼, 벤 애플렉, 오웬 윌슨, 줄리 델피, 에단 호크 등 한 작품 안에서 배우이자 각본가로 활약한 이들이 있다. 자신이 쓴 이야기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각본과 연기를 동시에 해낸 배우들의 작품들을 살펴보자.
<센스 앤 센서빌리티>의 각본가이자 배우, 엠마 톰슨
영화 시상식에서 한 사람이 서로 다른 2개 부문 수상 경력을 가진 경우는 드물다. 평생 한 가지만 집중해도 받기 어려운 상인데,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엠마 톰슨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는 기록을 세운 배우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과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하워즈 엔드>(1992)로 여우주연상을 받고, <센스 앤 센서빌리티>(1997)로 각색상을 받았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는 대만에서 세 편의 영화를 찍고 처음으로 해외에 진출한 이안 감독의 연출작으로,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 받은 영화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로 주요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받은 엠마 톰슨의 각색 경력이 궁금해지는데, 놀랍게도 <센스 앤 센서빌리티>는 엠마 톰슨의 각색 데뷔작이다. 엠마 톰슨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각색한 <센스 앤 센서빌리티> 이후로 <내니 맥피>(2005), <내니 맥피2>(2010), <애니>(2014) 등 가족드라마 장르의 각본을 주로 작업했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는 제목처럼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잘 맞춘 엠마 톰슨의 각색 덕분에 더 아름다운 작품이다.
19세기 말 영국, ‘엘리너’(엠마 톰슨), ‘마리안’(케이트 윈슬렛), ‘마가렛’(에밀리 프랑수아) 대쉬우드 세 자매와 어머니 ‘대쉬우드 부인’(젬마 존스)은 하루아침에 집을 잃게 된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을 첫 부인의 아들 ‘존’(제임스 플릿)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새로운 거처를 찾기 전에 존과 그의 아내 ‘패니’(헤리엇 월터)와 불편한 동거를 시작하고, 패니의 동생 에드워드 ‘페라스’(휴 그랜트)도 함께 머문다. 엘리너와 패니는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둘 다 마음을 제대로 표현 못 한다. 엘리너의 가족은 먼 친척이 마련해 준 집으로 떠나고, 새로 온 마을에서 신뢰받는 ‘브랜든 대령’은 마리안에게 단숨에 반한다. 그러나 마리안은 산책을 하다가 발을 삔 자신을 도와준 ‘윌러비’(그렉 와이즈)와 사랑에 빠진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인물을 보는 재미가 크고, 이러한 특징은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는 제목처럼 ‘이성과 감성’을 각각 엘리너와 마리안을 통해 표현한다. 이성적인 엘리너와 감성적인 마리안은 사랑 앞에서 상처받으면서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찾아간다. 엠마 톰슨의 각색과 연기를 보면서, 이야기와 사랑의 공통점은 균형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굿 윌 헌팅>의 각본가이자 배우,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두 배우가 직접 각본을 쓰고 출연까지 한 영화가 비평과 흥행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다. 이 영화는 바로 <굿 윌 헌팅>(1997)이고, 두 배우는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이다. 둘은 처음으로 함께 쓴 각본으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과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받고, 단숨에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맷 데이먼은 <굿 윌 헌팅> 이후로 구스 반 산트 감독과 다시 호흡을 맞춘 <제리>(2002), <프라미스드 랜드>(2012), 본 시리즈에서 호흡을 맞춰 온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제이슨 본>(2016)의 각본에 참여한다. 벤 애플렉은 자신이 연출한 <가라, 아이야, 가라>(2007), <타운>(2010)의 각본에 참여하고, <아르고>(2012)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는 등 연기와 각본뿐만 아니라 연출에서도 탁월함을 드러내고 있다. 두 사람의 대표작이 많지만, 두 사람이 함께 각본을 쓰고 연기까지 한 <굿 윌 헌팅>은 많은 관객에게 위로를 준 작품이다.
윌 헌팅(맷 데이먼)은 처키 슐리반(벤 애플렉)을 비롯한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술을 마시거나 싸움을 한다. MIT 공대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윌 헌팅은 수학과 교수 램보(스텔란 스카스가드)가 복도 칠판에 적어둔 문제를 단숨에 풀 만큼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 경찰 폭행으로 재판 중인 윌은 램보가 보증인을 자처하며 풀려난다. 램보는 자신과 수학을 연구하고 정신과 상담을 받는 걸 조건으로 걸고, 자신의 친구 숀(로빈 윌리엄스)에게 윌과의 상담을 부탁한다.
숀은 유년기의 아픈 기억에 시달리는 윌에게 ‘그건 너의 탓이 아냐’라고 말해준다. 처키는 늘 붙어 다니는 윌에게 자신과 멀어져도 좋으니 재능을 썩히지 말라고 거칠게 말한다. 숀과 처키는 윌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주는 이들이다. 세상의 기준과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고, 서로 멀어지더라도 더 넓은 세상으로 가라는 말은 진심 어린 애정이 아니면 빈말로도 하기 힘든 말이다. 우리는 언제나 위로가 필요하므로, <굿 윌 헌팅>의 장면들은 지칠 때마다 꺼내 보게 된다.
<로얄 테넌바움>의 각본가이자 배우, 오웬 윌슨
텍사스 대학교의 두 학생은 훗날 할리우드에서 이야기꾼 콤비가 된다. 그들은 오웬 윌슨과 웨스 앤더슨이다. 오웰 윌슨은 웨스 앤더슨 감독의 데뷔작 <바틀 로켓>(1996)부터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1998), <로얄 테넌바움>(2001)까지 초기작들의 각본에 참여했다.
‘웨스 앤더슨 사단’이라고 부를 만큼 웨스 앤더슨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배우들이 있는데, 그와 가장 좋은 호흡을 보여준 건 각본과 연기 모두에서 긍정적인 시너지를 보여준 오웬 윌슨이다. 특히 오웬 윌슨이 각본가이자 배우로 참여한 <로얄 테넌바움>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 후보에 오를 만큼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로얄 테넌바움(진 해크먼)과 에슬린 테넌바움(안젤리카 휴스턴)의 세 자녀는 천재로 불린다. 채스(벤 스틸러)는 투자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고, 입양한 딸 마고(기네스 펠트로)는 극작에 재능을 보이고, 막내 리치(루크 윌슨)는 주니어 테니스 챔피언이다. 그러나 로얄과 에슬린이 별거하고 세 자녀는 흩어져서 각자의 삶을 살며 성장한다. 로얄은 모아둔 돈이 떨어질 때쯤 집에 다시 돌아가기 위해 병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고, 오랜만에 가족들이 한집에 모인다.
테넌바움 패밀리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들이 화목하게 지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가족’이라는 당위성에서 벗어나고 나면 너무 다른 사람들이고, 가까운 만큼 상처도 많이 준다. 자신의 애정표현이 서툴고 상처를 줬다는 걸 알아도,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욕심을 숨기지 않는다. 진짜 화목한 관계란 투쟁하듯 서로 울고 웃으면서 견뎌야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비포 미드나잇>의 각본가이자 배우,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
사랑에 대해 한 편의 영화로 표현하는 것도 힘든데, 연달아서 세 편이나 완벽에 가깝게 만들어진 시리즈가 있으니 바로 ‘비포’ 시리즈다. <비포 선라이즈>(1995)부터 <비포 선셋>(2004)과 <비포 미드나잇>(2013)까지 리처드 링크레이터 감독과 줄리 델피, 에단 호크 세 사람이 만든 사랑의 풍경은 꾸밈없는 솔직함으로 관객들의 마음에 남았다.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 두 배우의 20대, 30대, 40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세 편의 영화를 보면, 사랑에서 중요한 ‘시간’의 속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비포 선셋>과 <비포 미드나잇>에서는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가 직접 각본에 참여했다.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비포 미드나잇>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 후보에 올랐고, 전미 비평가 협회상에서 각본상을 받았다. <비포 미드나잇>은 오래 호흡을 맞춘 두 배우의 각본 참여와 연기가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낸 작품이다.
셀린느(줄리 델피)와 제시(에단 호크)는 결혼 후 쌍둥이 딸과 함께 그리스에 머물고 있다. 유명 작가 제시가 레지던시에 초청받아서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제시는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곁에서 챙겨주지 못하는 게 계속 마음에 걸린다. 셀린느는 자신의 커리어와 관련해서 고민이고, 제시와 셀린느는 각자의 고민 때문에 티격태격한다.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은 보는 내내 낭만을 꿈꾸게 되는 영화이지만, <비포 미드나잇>은 좀 더 현실적인 작품이다. 낭만이 휘발한 뒤에 결혼과 육아 등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사랑을 어떻게 지속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보여준다. 셀린느는 제시에게 묻는다. 지금의 나를 만나도 그때처럼 말을 걸 거냐고. 사랑의 시작은 언제나 달콤하기에, 우리는 좀 더 씁쓸한 사랑의 중후반부를 제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낭만부터 현실까지 사랑이 무르익는 풍경을 보고 싶다면,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가 만든 장면들을 하나하나 음미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