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렇게 바랜 종이, 정갈하게 쓰인 붓글씨. 분명 동양화의 형태인데 낯선 냄새가 난다. 곤룡포 입은 왕 대신 망토 두른 배트맨이, 산수 대신 ‘배트맨 산도’가 등장하는 곳. 할리우드와 빌보드가 뒤섞인 21세기 신(新) 동양화, 바로 이름처럼 톡톡 튀는 팝 아티스트 손동현의 작품을 소개한다.

‘영웅배투만선생상’
‘파주라이투이어선생상’
‘금강배투만산도’

먼 옛날, 동양화가 기록하는 소재는 주로 이런 것들이었다. 바람이 불고 가지가 흔들리면 꽃향기가 퍼지는 무릉도원, 말 한마디로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자들. 다시 말해 당대인들의 이상향이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치던 존재들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2000년대의 대한민국, 사람들 마음속에서 동양화는 켜켜이 먼지 쌓인 지 오래였다. 이미 지나가 버린 시대를 되돌아보는 이는 적었다. 동양화를 공부하던 손동현은 생각했다. 지금 우리에게 그런 존재는 뭐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21세기형 동양화는 그렇게 탄생했다.

‘암흑지주다수배이다선생상’
‘영웅인구래다불가족도’
김홍도의 ‘씨름도’
손동현의 ‘씨름도’

이곳엔 조선 시대의 왕도, 푸른 소나무와 자욱한 안개 사이로 쏟아지는 폭포수도 없다. 대신 거친 숨소리를 구름처럼 몰고 다니는 다스베이더가 있고, 초능력으로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 가족이 있다. 그런가 하면 먼 옛날 김홍도가 거닐었던 광장에서는 에일리언과 프레데터가 엎치락뒤치락 씨름하고, 그 옆에선 한 무리의 E.T가 느긋하게 구경을 한다. 낯익은 듯 낯선, 그야말로 참 매혹적인 풍경이다.

‘미래경찰노보갑선생상’
‘영웅울배린선생상’
‘우주전사요다선생상’

‘그래도 난 동양화요’ 주장하듯 작품 한쪽으로 붓글씨로 쓰인 한자가 동동 떠다닌다. 보아하니 제목인 것 같긴 한데 도무지 해독할 수가 없다면(그래서 알아들은 척 대충 넘기려 했다면) 얼른 한글 제목을 볼 것! 눈으로만 훑는 대신 반드시 발음해 보아야 한다. ‘악동 족거 선생(조커)’, ‘막강 이인조 술액 동기(슈렉과 동키)’, ‘암흑지주 다수배이다 선생(다스베이더)’ 등 주인공의 이름을 교묘하게 패러디한 제목에 웃음이 터져 나올 테니까.

‘왕의 초상’, 마이클 잭슨이 ‘팝의 황태자’와 ‘팝의 황제’라고 불리던 시절을 구분하여 각각 왕자와 왕의 의자에 앉혔다
‘악동족거선생상’
‘쌍작도’

이렇듯 손동현의 작품들은 언제나 유쾌하다. 그의 첫 전시 제목이었던 <파압아익혼> 역시 마찬가지다. 잘못 끼운 퍼즐처럼 복잡해 보이는 이 단어의 의미는 사실 간단하다. 바로 ‘팝 아이콘’(빠르게 발음할수록 정답에 가까워진다)! 가수로 따지면 데뷔 무대, 영화배우로 따지면 첫 주연작이나 다름없는 자리였던 만큼, 그는 이 파격적인 제목으로 더욱 주목받았다. 이쯤 되니 실제로 손동현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유쾌한 사람일지 슬쩍 궁금해진다.

‘문자도 - 맥도날드’
‘문자도 - 나이키’
‘007 에른스트 스타브로 블로펠드’

이렇게 동양화의 부활을 선언한 이래,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시도해왔다. 조선 시대 왕의 의자에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을 앉혔고, 영화 <007> 시리즈 속 악역들을 불러냈다. 알파벳이 더 익숙한 브랜드 로고를 붓글씨로 풀어내기도 했다. 최근에는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다루는 대신, 동양화의 여섯 가지 제작 원칙을 의인화했다. <육법>이라는 제목을 단 이 작품으로 그는 제15회 송은미술대상을 받으며 동양화의 부활을 알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 그의 도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육법> 중 ‘Master Bone Method’

 

<육법> 중 ‘Master Spirit’

한때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그 후, 옛것에 현대적인 감성을 녹여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는 ‘뉴트로’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오래 전 시작된 손동현의 작품은 이 두 가지를 모두 품는다. 이제 동양화는 더 이상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문득 궁금해진다. 21세기를, 지금의 우리를 먼 옛날로 기억할 이들에게 이 ‘동양화’는 과연 어떻게 보일까?

<육법> 중 ‘Black Mountain’
Writer

언어를 뛰어넘어, 이야기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마음속에 새로운 씨앗을 심어주고,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가 되어주니까. 그래서 그림책에서부터 민담, 괴담, 문학, 영화까지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중. 앞으로 직접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며 더 풍성하고 가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나가기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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