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렌스 퓨(Florence Pugh)는 근래 가장 주목받는 배우 중 한 명이다. 2016년 <레이디 맥베스>로 평단과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 영화로 박찬욱 감독마저 사로잡아 BBC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2018)의 주연을 꿰차며 한국 관객에게도 널리 이름을 알렸다. 올여름에는 공포 영화 <미드소마>에서 이전과 또 다른 독특한 분위기와 캐릭터를 소화해내며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부끄러움이 없다. 자기표현에 누구보다 솔직하다. 그리고 카메라는 온갖 감정과 욕망이 있는 그대로 집약되어 나타나는 배우의 얼굴을 놓치지 않고 클로즈업한다. 그렇게 우리 눈앞에 드러난 플로렌스 퓨의 연기를 보면, 단지 "연기력이 좋다"는 말로는 한없이 표현이 부족함을 느낀다. 영화마다 전혀 다른 분위기와 모습으로 재탄생하는 그의 '강인한 얼굴'은 단지 영화를 대표하는 수준을 넘어, 영화를 장악하고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인상을 지배한다. 

 

'불'을 감춘 차가운 무표정의 얼굴, <레이디 멕베스>(2017)

플로렌스 퓨의 표정 연기는 무표정마저 극적이다. <레이디 맥베스>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늙은 지주에게 아내로 팔려 가 반항적 하인을 욕망하는 대저택의 안주인 역. 당시 그가 아니라 어떤 배우라도 절대 쉽지 않았을 캐릭터였지만, 당시 20대 초반의 신예 배우였던 플로렌스 퓨는 나이와 생각을 가늠할 수 없는 서늘하고 강렬한 얼굴로 그야말로 살아있는 캐서린이 된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 온종일 몸을 동여매는 코르셋을 착용한 채 가만히 앉아서 유령처럼 시간을 허비해야 했던 '캐서린'은, 어느 날 시아버지와 남편을 집을 비움과 동시에 억압됐던 욕망에 눈을 뜬다. 겉으로는 한없이 차갑고 정적으로 보이지만 그 속에 있는 불같은 욕망과 행동력을 숨겨야 했던 캐서린을 연기하는 데 있어, 다채로운 감정과 강인한 에너지, 단호한 의지를 지닌 배우 플로렌스 퓨의 천성은 안성맞춤이나 다름 없었다. 영화의 감독 윌리엄 올드로이드는 "오디션장에서 만난 그는 유머 감각, 결단력, 뜨거운 의지,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 등 우리가 캐서린에게서 찾고자 한 모든 자질을 천성적으로 뿜어내고 있었다"고 칭찬했다.

그다지 많지도 않은 대사와 극적일 것 없는 장면 속에서도 쉼 없이 이글거리는 캐서린의 눈빛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무수히 많은 감정과 욕망을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이 영화 전에는 단 두 편의 영화에 출연했을 뿐인 신예였지만, 이 연기를 통해 그는 유수의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안았다.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드는 배우의 팔색조 얼굴, <리틀 드러머 걸>(2018)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6부작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에서 그는 배우를 연기한다. 그것도 스파이가 되어 테러리스트를 연기하는 배우를. 연기를 연기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가늠이 어려운 섬세한 작업일 터. 미묘한 표정과 몸짓 하나로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 사이 경계를 극단적으로 오가는 연기를, 그는 마이클 섀넌과 알렉산더 스카스가드라는 개성 넘치는 연기파 선배들 앞에서 당당하게 펼쳐 보인다.

열정과 재능이 있지만, 아직 무명인 배우 '찰리'. 그는 자기 이름을 알릴 기회를 잡기 위해 연극 무대와 오디션장을 전전하다가 이국에서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빠져든다. 그는 다름 아닌 이스라엘 정보국의 비밀 요원. 이스라엘 정보국은 찰리에게 현실 세계의 테러리스트를 연기하라는 스파이 역을 제안하고, 찰리는 제안을 받아들이며 사랑을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쓰게 된다.

금발에 짙은 눈썹, 시원한 이목구비와 때로는 고아하고 때때로 격정적인 플로렌스 퓨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젊은 시절의 케이트 윈슬렛이 떠오른다. 그를 <더 폴링>(2016)에 캐스팅했던 캐리 몰리 감독은 "마치 어린 케이트 윈슬렛이 오디션 룸으로 걸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 진실과 허구,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긴장되는 상황 속에서 한껏 움츠러들었다가 이내 뜨거운 감정을 폭발시키기도 하는 그의 팔색조 같은 모습은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8)나 <레볼루셔너리 로드>(2008)에서의 케이트 윈슬렛을 고스란히 떠오르게 한다.

 

절망 너머를 목격한 이의 한껏 찡그린 얼굴, <미드소마>(2019)

그의 진가가 인정받은 것일까? 장편 데뷔작 <유전>(2018)으로 공포 영화 차세대 거장으로 지목받은 아리 에스터의 신작 <미드소마>에서 플로렌스 퓨의 얼굴은 영화의 상징 그 자체가 된다. 얼굴 전체가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포스터 프레임 대부분을 채우는 그의 커다란 얼굴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흉하게 일그러진 채 어딘가를 응시하며 묘한 불편함과 호기심을 동시에 자극한다.

플로렌스 퓨가 연기한 주인공 '대니'는 영화 시작과 동시에 감당하기 힘든 비극을 마주한다. 슬픔에 잠겨 허덕이던 그는 유일하게 의지하던 남자친구를 따라 스웨덴 작은 마을에서 열리는 여름 축제에 참여하게 되고, 그곳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에 맞닥뜨리게 된다.

영화 줄거리 자체는 인물들이 광신도 집단의 의식에 휘말리는 전형적인 포크 호러, 오컬트 장르의 전개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종일관 밝은 화면과 목가적인 배경에서 펼쳐지는 미장센과 아리 애스터 특유의 기괴한 연출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플로렌스 퓨의 존재감이다. 그는 이 작품 속에서 여러 차례 절규하고 오열한다. 그러나 얼핏 똑같이 반복되는 듯한 감정의 폭발 속에 점차 변화하는 인물의 심리와 이야기의 주제 의식이 그의 얼굴을 통해 세심하게 드러난다.

 

플로렌스 퓨는 극 중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무척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왕성한 인스타그램 활동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의 계정에는 갖가지 재미있는 표정들로 수놓은 사진들이 가득하다. 팬들의 리뷰에 피드백도 적극적이다.

 

플로렌스 퓨 인스타그램

 

Writer

끊임없이 실패하고도 여전히 사랑을 믿는 사람. 나를 어리석게 하는 모든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것들의 총체가 곧 나임을 믿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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